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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론

1.7리터 양조간장을 모두 마시고 든 생각

by 시야

간장 한 통을 다 비웠다. 자취방 계약은 이제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 휴학을 결정한 후로 남아있는 소모품들을 모두 소진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리고 오늘 빈 간장 통을 재활용에 버렸다. 양조간장은 마트에 진열된 간장 중에서 제일 큰 용기에 담겨있었다. 당연하게도 이 간장을 모두 먹은 사람은 나였다.


보쌈을 만들 땐 200ml를 썼다. 집에 초대한 사람들도 간장을 먹었을 테지만, 그것은 아주 소량이다. 결국 약 1.7리터의 양조간장은 내가 다 먹었다. 몇 개월에 걸쳐서 제육볶음을 만들고, 볶음밥을 만들고, 두부조림을 만들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야금야금 간장을 먹어댔다.


만약 하루아침에 1.7L의 간장을 마시라고 한다면 어떨까. 고문이 따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실은 하루 만에 간장을 모조리 마신 나와, 몇 개월에 나눠서 간장을 먹은 나는 크게 다를 바 없다. '내가 간장을 먹었다'는 사실은 똑같다. 하지만 어느 경우는 고문이고, 어느 경우는 훌륭한 끼니가 되었다. 같은 주체가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 이렇게도 달랐다.


빈 간장 통을 보며 작은 것들을 생각했다. 하루아침에 간장 한 통을 먹을 순 없지만, 여기저기에 조금씩 넣다 보니 결국 한 통을 다 먹게 되었다. 하루이면 고문인 일을, 몇 개월로 나누니 양념이 되었고, 맛이 되었고, 피와 살이 되었다. 똑같은 일이 주어진 시간에 따라 과정도 결과도 달라졌다. 꾸준함이라는 건, 평범한 사람이 간장 한 통을 모두 비워내게 할 만큼 강했다.


모든 자기 계발서는 입을 모아서 말한다. 작게 시작하라고, 목표를 가장 작은 단위로 나누라고. 하루에 1%만 성장해도 37배 성장할 수 있다고. 책에서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예시를 오늘 찾았다. 게으름이 꾸준함을 앞지를 때, 나는 자기 계발서의 어떤 구절도, 예전의 다짐도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저 1.7리터의 양조간장을 떠올리겠다. 빈 간장 통은 오늘의 1T 스푼이 무의미하지 않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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