긁적거리면서 읽어주십쇼
고상해 보이는 취미가 하나씩 꼭 있다. 독서, 다도, 명상 이런 것들. 쓰기도 아마 그럴 것이다. 뭔가 있어 보이고, 대단해 보이는 것. 입 다물고 가만히 그런 편견의 수혜를 받아도 좋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글쓰기가 취미인 사람으로서, 사람이 글을 쓰는 이유는 연약해서라고 생각한다.
쓰기는 수학문제 앞에서 풀이과정을 적는 것과 비슷하다. 쉬운 문제는 암산으로 될지 몰라도, 복잡한 문제에는 연필을 집어들고 만다. 적지 않고는 차마 감당이 안 되는 난이도라서 그렇다. 미지수의 값을 알아내고, 대입하고, 계산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풀이과정을 적었다.
글도 마찬가지다. 머리만으로 도저히 풀어내지 못할 때,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 때 적는 풀이과정이다. 따라서 쓰지 않는 사람은 암산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쓰는 사람은 풀이과정을 적는 사람이다. 적는다는 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연필과 종이를 빌리는 일이다. 말했듯이 다분히 연약한 이유다.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이든, 쓰지 않는 사람이든 누가 더 낫다고 말할 순 없다. 그저 글이 생각하는 것만큼 고상한 취미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난 쓰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서투름은 족족 글이 됐다. 적으면서 어리석은 나를 마주했고, 실마리를 찾아냈다. 그걸 삶에 들였다.
혹시 글이 가장 잘 써지는 시간대를 아는가? 바로 새벽이다. 주변은 어둡고, 인간의 생체 호르몬으로 인해 상당히 센치해지는 시기. 새벽은 중력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는 떠다니는 생각들이 새벽의 중력에 고스란히 가라앉는 기분을 느낀다. 왜냐하면 글은 가라앉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장들이 쌓이면 글이라고 부른다. 그럼 그건 어떻게 쓰여졌을까. 먼저 머리 안의 문장을 주목해야 한다.
언제가 들었던 책의 한 구절, 오늘 나눈 대화, 지금의 기분이나 생각들이 뭉쳐지면서 하나의 문장이 된다. 지면 위에 문장과 문장이 합쳐진 게 글이라면, 그 한 문장은 머릿속의 문장들이 누적된 하나의 글이라고도 볼 수 있는 거다. 즉 한 문장 한 문장이 한편의 글인 셈이다. 그렇기에 쓰기 위해서는 충분히 생각들을 가라앉혀야 한다. 글은 생각을 진정시키는 일이다.
또한 나를 찾는 일이다. 글로 현재 상황, 감정, 느낌 같은 것들을 인식하다 보면, 그 끝에 있는 자신마저 인식하게 된다. 결국 모두 나로부터 출발한 것들이니까. 쓰다 보면 분명히 온다. 내게 이런 결핍이 있었고, 이런 생각이 있었고, 이런 문장이 있었다는 걸. 나조차 몰랐던 스스로는 그런 식으로 발견된다. 쓰기는 삽질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과 친해지면, 그 사람의 글이 궁금하다. 상대는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일지 궁금해진다. 실제로 지인의 글을 읽다보면 많은 경우에 더 애틋해졌다. 내가 알고 있는 그 길 이외에, 상대를 좋아할 다른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한 편의 글에 일인분의 사람을 전부 담을 순 없다. 하지만 글에는 분명 사람이 담겨있고, 당시 필자에게 작용된 중력의 결과물이 글이다.
거창한 걸 써내려고 마음먹는 순간, 한 글자도 써지지 않았다. 충분히 솔직할 때 글은 저절로 써진다. 한 편의 글에 지나친 장인정신을 발휘하지 말자. 어차피 완벽한 글과 생각이란 존재하지 않으니. 그저 지금 여기서 최선을 쓰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한다. 글은 완벽한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한없이 연약한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