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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크한 유니씨 Jul 31. 2019

<남은 비행 시간>

-지수의 엽편

 화장실, 화장실이 제일 문제야. 익스큐즈미, 그거면 되나? 통로 쪽으로 바꿀까? 에이, 어떻게 선점한 창가 자린데. 서울 부산도 아니고, 무려 다섯 시간, 당연히 창가지. 아닌가? 그 시간이면 화장실을 두 세 번도 갈 수 있는데 번번이 미안해야 하는 거잖아. 그냥 통로로 하고, 맥주도 마시면서 편안히 가? 아냐 아냐 아냐, 밤 시간도 아니고 낮인데, 해 지는 풍경을 날면서 볼 수도 있다고. 흰 구름에 붉은 노을까지 발 밑에 깔리는 건데, 언제 또 보겠어? 창가로 고!... 고오? 비 오고 구름 끼면 말짱 도루묵이잖아. 가만, 날씨 정보는 며칠 전부터 믿을 수 있지?


 비행기에 올라, 선반에 적힌 숫자와 알파벳을 짚어 자리를 찾았다. 좌석 세 개가 붙어있는 맨 안쪽 자리. 선반 위에 배낭을 올리고 작은 에코백은 들고 앉았다. 승객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옆 자리는 아직이다. 혹시 빈 자리일까, 내심 기대감이 부푼다. 얼른 문 닫고 출발하기를, 시계를 확인한다. 화장실 한번 다녀와? 아까보다 통로가 빽빽하다. 출발하면 가야지. 그나저나 너무 빨리 탔구나, 물 밀듯 밀려오는 승객들이라니. 한 분, 두식이, 석 삼, 너구리, 오징어… 눈꺼풀이 무겁다 싶어 내려앉는 대로 잠깐 둔 것 뿐인데, 고른 진동에 눈을 떠보니 상황 종료. 비행기는 청사를 빠져 나와 활주로를 향해 거대한 몸체를 움직이는 중이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일은! 옆 두 자리는 각각 자리 주인들을 모시고 있다는 것. 아니, 그렇게 깊이 잠들었었단 말야? 앉는 기척도 없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세 자리가 꽉꽉 들어차고 보니 왠지 통로가 저 멀리다. 역시 통로로 했어야 했나, 구석에 처박힌 이 자리가 뭐 좋다고, 잠들면 그만인 걸. 두 사람보다 늦게 탔으면 얼굴이라도 확인 했을 텐데. 너무 서둘렀다. 먼저 타나 마지막에 타나, 비행기 문 닫고 뜨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옆 사람이랑 인사를 해야 하나? 영어가 나을까, 불어가 좋을까. 영어(인사말)밖에 안 되잖아. 말은 짧고 울렁증은 길다. 눈 맞추기도 어색하고, 대충 앉아서 가자. 승무원들이 각자 자리에 앉아 벨트를 묶는다. 이제 곧 이륙이네. 화장실은 그 다음으로 미뤄야지. 비행기는 쭉 뻗은 활주로를 질주해 떠오를 것이다. 이륙 장면에서 가장 신기한 건 비행기 바퀴의 움직임이다. 육중한 몸체를 마지막까지 버텼다 땅을 찬 바퀴는, 그 존재를 감추면서 비행에 최적화된 날렵한 몸체를 만들어준다. 비행기가 땅에서 떨어질 때, 그 순간의 바퀴를 느껴보고 싶다. 살짝 눈을 감고 다음을 기다린다. 잠깐 멈췄던 비행기는 마침내, ‘구르르릉’. 속도는 소리에 비례하고 소리는 바람을 가른다. 멀리 뛰기 선수들이 전속력으로 도움 받기를 하듯, 속도를 몰아 활주로를 밟은 비행기는 잡을 수 없는 하늘의 풍경이 된다. 좌석은 창 밖의 지평선에 기운 각도를 만든다. 장대 끝에 매달린 선수가 장대를 버리고 허공에 떠오르는 것처럼, 타석에서 때린 공이 시원한 포물선을 그리며 뻗어가는 것처럼, 땅을 차고 오른 비행기는 도착지에 내려앉으며 비로소 넓게 퍼진 포물선을 완성할 테다.



비행기의 출발은 마음의 진정을 도왔다. 남은 비행 시간 4시간 58분. 앞 좌석에 붙은 모니터를 확인하며 테이블을 내리고 다이어리를 꺼낸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창 밖을 담고 다이어리에 붙여 오늘 자 기록을 보탠다. 기내에서 시간은, 붙박이 같이, 유예된 시간으로 머무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비행기가 만들어내는 매력적인 속임수다. 시공을 날아 어떤 경계를 훌쩍 넘어서는 일, 움직이는 시간과 공간 위에 있음을 생생히 체감할 수 있는 순간이 여기 이 자리 말고 또 있을까.

다이어리를 끄적이고 책을 들춰보고, 카메라를 꺼내고 집어넣고, 나름 들 떠 분주한데, 옆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차마 못 볼 뻔 했다. 내가 생각해도 혼자 되게 부산스럽다 싶어져, 목례라도 해야겠다 고개를 돌리는데 앞만 보는 옆 사람 얼굴로 향하던 시선 끝에 뭉툭한 것이 걸려들었다.

 

 정물처럼 앉아있던 이유가 그래서였나 보다. 옆 사람은 자신의 오른 손, 내 왼팔과 닿은 쪽 손 위에 왼손을 포개고 있다. 그런데 오른 손은 맨손이 아니다. 옷인지 이불 같은 걸로 오른 손을 감고, 그게 풀리지 않게 잡고 있는 듯 보였다. 꼭 한쪽 손을 숨긴 것 같은 거다. 순간 찌릿, 왼팔이 감전 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행기의 무사 출발에 들떠 한참 부주의했다. 허리를 세우고 엉덩이를 좌석 깊숙이 붙였다. 얼굴은 정면을 향한 채 눈알만 움직여 옆 사람의 손을 슬금슬금 훔쳐보기 시작했다. 

 옆 사람 팔은 팔걸이 너머로, 팔걸이에 팔을 걸치지 않은 채였다. 어깨부터 팔꿈치까지는 ‘괜찮은데’, 손목 부분부터 손가락까지 손 전체가, 제법 부피감 있게 감싸져 있다. 조금 큰 권투 글러브를 낀 모양, 또는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온 동네 무주택 두꺼비들에 지어줬던 두꺼비집처럼 생겼다. 그러니까 저 손에 무언가를 숨기고 손을 덮었다면 그 무언가는 보이지 않을 거고, 손가락 움직임도 드러나지 않겠다 싶다. 최악의 경우부터 머릿속이 채워진다. 만에 하나, 무언가를 쥐고 있고 옷인지 담요인지는 그것을 감추기 위한 포장이라면? 손 안에 있는 것을 감춘다? 만에 둘, 그렇다면 그것은 흉기? 설마 총?? 상상이 비행기보다 빠른 속도를 낸다. 남은 비행시간 3시간 47분, 비행기가 가긴 가는 건지, 창 밖의 흰 구름 떼 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다. 


 승무원이 기내식 카트를 밀고 온다. 평화로운 술렁임이 시작된다. 기회를 잡아 화장실을 가든지 해야겠다. 식사를 선택하는 옆 사람 목소리에 집중한다. 이렇다 할 ‘이상함’ 없음이다. 승무원이 가장 안쪽부터 식사를 건넬 때, 승무원과 내가 동시에 도시락을 잡고 있는 찰나, 이보다 더 강렬할 수 없는 눈빛을 승무원에게 보냈다(내 옆 사람 손 봤어? 이상하지? 왜 저러고 있는 것 같아?). 그러나 승무원은 흐트러짐 없는 미소를 지을 뿐(자, 난 손 놓을게, 이제 맛 잇게 먹어). 뒤이어 옆 사람이 왼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자 도시락이 사뿐, 승무원 손에서 내려졌다. 여전히 오른 손은 박제 된 듯 움직임이 없고, 내려온 식판이 시선을 차단한다.

 돌발상황이 발생하는 건 아닐까 있는 대로 촉수를 세워 옆 자리로 뻗었으나 그 또한 상상으로 그쳤다. 사실, 누구나 보안대를 거쳐 탑승하기 때문에 수상한 걸 지니고 비행기에 오르기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우린 너무 많은 장면들을 봐오지 않았던가? 테러범으로 변신한 승객 1이, 철커덕 철커덕, 총을 조립해 비행기를 탈취하는 장면이랄지, 기내에서 독침을 날리거나 승무원을 인질로 잡아 흉기를 들고 설치는 승객 2, 3, 4… 들이 나오는 영화들을(실제 국제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도 하다)! 괜히 영화가 만들어졌겠나 따져보면 저 손에 총이나 칼이 들렸대도 이상할 건 없다는 얘기.

 숟가락이며 각종 소스, 밀폐용기들. 포장된 기내식을 하나하나 뜯으며 옆 사람의 손놀림을 쫓는다. 왼손과 입(치아)으로 포장을 벗기는데, 오른 손은 역시나 꿋꿋한 석고상이다. 이쯤 되니 저 알 수 없는 오른 손은 궁금증을 넘어 두려움으로, 걱정을 일으키다 다시 실체 없는 공포가 되어 좀처럼 안도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괜찮은지 슬쩍 물어볼까? 아유 오케이? 아직 별 일 없는데, 대체 무슨 일 인거니? 묵묵히 식사를 시작한 옆 사람을 계속 볼 수 없어, 나도 따라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능숙한 왼손잡이, 옆 사람은 이번에도 ‘특이사항 없음’으로 식사를 마친다. 남은 비행 시간 2시간 15분, 지금까지의 시간만큼 좀 더 날아야 할 시간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통로는 어느새 왔다 갔다 하는 승객들로 소란하다. 저 뒷자리 어디쯤에서 아이 우는 소리도 들리고 조금 느긋한 포만감을 느끼던 중, 악! 하마터면 비명이 나올 뻔 했다. 빈 도시락이 치워지기 무섭게, 이 옆 사람이 글쎄, 오른 손을 감고 있는 거적때기 같은 걸 푸는 것이 아닌가. 우왓, 드디어 작전 개시인가. 나 어떻게 되는 거야. 폭탄이야 칼이야. 난 뭐가 있지? 터지지도 않는 휴대전화를 쥔 채 그 손놀림을 지켜보는데, 이쪽 시선을 알아챌까, 오래 고정시킬 수도 없다. 대체 왜, 어쩔, 뭐 하는 거야? 한 바퀴, 두 바퀴... 얼굴 붕대를 풀고 다른 인격과 모습으로 돌변하는 무슨 영화의 어떤 주인공처럼, 두꺼비 집 크기가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했다. 


 남은 비행 시간 1시간 43분. 아직은, 살기에도 죽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먼저 움직여야 한다. 벨트에 힘을 주어 풀고, 하나, 둘, 세엣! 좌석에서 엉덩이는 뗐고 무릎을 펴려는 순간, 옆 사람이 벌떡, 먼저 일어났다. 스르르, 거적때기는 손에서 분리돼 가볍게 떨어졌고 나는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허물 같은 거적때기에서 잽싸게 눈길을 거둬 자리를 빠져나가는 손을 찾는다.

손, 손은? 뭐야? 손에 뭘 들었어? 저 손이야?? 

아! 머릿속이 쩍 갈라지면 이런 느낌일까. 여기가 보리수 나무 밑도 아닌데 갈라진 틈에서 어떤 깨달음이 불쑥 올라온다. 그것은 한없는 쪽 팔림, 그리고 꽤나 익숙한 동병상련. 머리를 굴리고 말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아구를 맞춰보면, 옆 사람도 못지않게 불안했던 것이다, 조금 다를 뿐인 자신 때문에 주변에서 놀라고 불편해 할까 봐. 팔걸이를 사용하지도 못하고 손을 내놓지도 못한 채, 스스로 정물 비행을 유지 할 수밖에 없었을 상황. 손을 씻고 온 듯, 들어와 앉는 옆 사람과 정직하게 눈을 마주쳤다. 동시에, 바닥에서 주워 든 문제의 거적때기도 건넸다.

 남은 비행시간 49분. 즉석카메라로 저녁 하늘을 몇 장 찍었다. 필름에 물드는 노을 색깔이 내 마음에도 들었다. 흰 구름은 붉은 양탄자가 되어 시간을 이동시키고 나는 그 시간에 실려 다음 공간으로 건너왔다. 여백에 ‘bon voyage’ 라고 적은 사진 한 장을 옆 사람에게 내밀었다. 용기를 끌어 올려, 마음을 아주 크게 먹고 입도 떼 보았다.


- 너 가져(for you), 이 멋진 하늘을 나만 보고 있었다(You didn't see the sky because of me).

= wow, what a beautiful sky. thank you, nice guy(오, 아름다워. 고마워, 이 양반아).

ps 다섯 시간 동안 화장실을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곧 도지겠지만 잠시나마 영어 울렁증을 극복했다. 불안하지 않았다면 옆 사람에게 끝까지 하늘을 보여주지 못했으리라. 불안했으므로 불안에서 벗어났고 불안해서 불안을 알아보았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불안은 영혼을 잠 깨운다. 그리고 다른 불안을 위로하고 잠재운다. 남은 비행 시간 6분.

이어서,

La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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