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도리에 가보았어요
2010년 6월 24. 그날은 Y네와 함께 한 2박 3일 제주도 여행 마지막 날이자 내 생일이었다. 여행 동안 남아공 월드컵이 열리고 있었다. 낮에는 제주도를 여행하고 저녁에는 술을 마시고 새벽에는 tv 중계를 보았다. 제주도에서 생일을 맞이하다니, 뭔가 잊지 못할 추억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자, 기대감이 부풀었다. 집으로 가는 비행기는 늦은 저녁시간, 표선이었던 숙소를 나와 김영갑 갤러리à 성산일출봉à 공항으로 향하는 동선을 짰다.
Y는 내 생일을 기억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도 인사가 없었다. 지나다 보면 생각나겠지, 하루 종일 같이 보낼 건데 설마 모를까, 처음엔 여유로웠다. 매년 서로의 생일은 물론, 남편들 생일, 결혼기념일도 챙기는 사이, 학생 때 만나 벌써 19년 째, 한 동네에 살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부터다. 단지 숙소에 달력이 없어서 그럴 거라고, 매일 밤 축구를 보느라 아직 정신이 말짱하지 않은 걸 거라고, 나는야 속 넓은 선배, 후배의 눈치 느림쯤이야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지,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김영갑 갤러리에서, 주인 따라 시간도 정지된 듯 한, 텅 비어있는 여백의 시간을 느끼며 ‘작가의 용눈이 오름’을 한참 바라보았다. 짬짬이, 뛰다가 넘어지거나 흙 길에 앉아 놀고 있는 세 살짜리 두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궁댕이를 털어주었다. 마당의 얕은 돌담에 앉아 먹고 싶은 점심 메뉴를 꼽아보고, 정원에 자리한 조각상 들을 들여다 보며 수다하고 셀카도 찍으며, 이제 나올 때가 되고도 남을 시간을 보내는데도 아, 이 Y라는 분, 한 동네 거주 10년, 만난 지 19년 차인 이 후배 Y가 글쎄, 생일에 대한 그 어떤 아는 척도 하지 않는 것이다.
슬슬, 속 넓은 선배는 속 좁은 선배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이건 잠시 잊은 게 아니라 전혀 생각조차 못하는 것 같은데? 엊저녁은 마지막 밤이라고 거하게 횟집을 들었다 놨다 했는데도 아무 ‘액숀’이 없었잖아. 아예 까먹은 게 분명해. 어제의 ‘무 액숀’이 오늘 아침의 써프라이즈를 위한 것이 아닐까, 김칫국을 수영장만큼 들이마셨던 스스로에게 더 화가 났다.
이쯤 되니 속 넓은 선배고 나발이고, 눈치에 센스도 없는 ‘야속한 후배’로 Y를 위치시켰다. 그리고,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오늘을 마무리 할까, 오바 육바, 생각이 널뛰기 시작했다. 어제는 까먹을 수 있다고 쳐, 오늘은 생각이 나야지, 벌써 우리가 몇 년인데. 그리고 지금 떨어져나 있어? 2박 내내 같이 있으면서 전야제는 못 해줄 망정 어떻게 모르냐고?!
말하지 않았는데 먼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만큼 소모적인 꼴이 세상에 또 없다. 당연히 기억 못 할 수도 있고 그렇다면 먼저, 오늘 무슨 날이게? 싸인을 주거나 미역국이 먹고 싶다, 복선을 깔 수도 있었을 텐데, 세련되고 장난스럽게. 그러기는 커녕, 2박 3일 내내 나 혼자 그네 구르고 널 뛰고, ‘얘가 기억하나 못하나 보자’ 했던, 그 못난 심보가 지금 생각하면 한없이 유치하고 우스웠다, 나 왜 그랬니.
나는 먼저 말 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 몸이 편치 않으니 그런가, 이해를 할 것도 같고, 아프면 동서남북도 없이 그래도 되나? 이해가 안 될 것도 같았다. 꾸역꾸역, Y가 모른다는 걸 나도 모르는 척 넘어가 보자, 마음을 다독였다. 근데 뭔가 서운했던 건, Y가 몰랐다는 것보다, 이렇게 넘긴다는 것이 우리 사이의 두께를 말해주는 것 같아서였다. 서운함을 넘어선, 고작 이 정도였나 하는 이상함, 불안함을 넘어선 어떤 거리감이 올라오는 느낌 같은 것들. 하여간 복잡한 감정이 마음 한쪽에서 뒤섞이고 있었다. 기회를 틈타 톡 까놓고 말을 던져볼까 싶기도 했으나 눈앞에 펼쳐진 마지막 제주도와 천지분간 안 되는 아이들의 손을 잡느라 어느새 복잡한 생각이 밀려나고 있었다.
김영갑 갤러리에서 나와 동쪽 도로를 달려 성산일출봉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일출봉이 보이는 한 식당에서 푸짐한 점심을 먹으며 노닥거리고 웃었다. 눈 앞의 웅장한 성산봉, 오르고 싶어서 발바닥이 간질거렸지만 아이들과 오르기는 무리, 주변에서 놀자며 막 근처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을 때, Y가 말했다.
“발바닥이 너무 아픈데. 발을 디딜 때마다 아파서 걸을 수가 없어요.”
그랬다. Y는 출산을 하기 무섭게 암을 발견, 수술을 받았다. Y의 아이가 채 두 돌이 안됐으니 수술 한지 이제 2년째였다. 수술을 받고 이어진 항암치료를 견디고, 여느 해처럼 두 가족이 함께 떠나 온 휴가였다. Y는 남편과 시댁, 친정과 형제자매, 직장과 친구들에까지, 두루 살펴 마음을 나누며 늘 친절했다.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씩씩하고 잘 웃었기에 이제 괜찮은가 보다, 알지도 못하면서 철썩, 믿고 있었다.
발바닥이 아프다는 것, 그게 대체 어떤 건지 나와 남편들은 전혀 알 수 없었고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자기 몸을 고스란히 떠받치는 두 발, 왼 발 오른 발, 차례로 땅을 밟아 몸을 움직이게 하는 그 발이, 땅에 닿으면 전기가 오는 것처럼 찌릿찌릿 아프다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렇게 되는 걸까. 하이힐 신어서 뒤꿈치 까지는 통증, 뾰족구두에서 발을 빼내면 엄지발가락이 구두 모양으로 쏠려있는 그 아픔쯤으로 Y의 통증을 느낄 수 있을까? 아프면서도 미안해 하고, 자신도 처음인 통증 앞에 놀라고 겁을 내면서도 웃던 Y. 웃음으로 고통을 감출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울면서도 웃던 얼굴. 나는 그 때 웃는 얼굴이 저토록 슬프고 아플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뜨거운 돌 위를 걷거나 가시 위를 걸으면 저렇게 걷게 될까 싶어지는 웅크림도 아니고 나아감도 아닌 겅중거림. 남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차에 오르던 그 몸짓과 표정을 지금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다. 사람은 철저히 혼자구나. 여행 내내 같이 웃고 떠들고 신날 땐, 마치 우리가 하나이고 비슷한 사람들 같지만 정작 아프고 어렵고 고통스러울 땐 닿기는 커녕 접점 하나 없는, 분명한 차이를 지닌 다른 사람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우리는 그저 차 안에 그를 앉게 하고, 네 개 문짝을 활짝 열어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이도록 했을 뿐이다. 세 살 동갑 친구라고, 아이들은 꺅꺅 소리를 지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그들만의 즐거움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엄마의 아픔을 알진 못해도 기쁨을 차오르게 해주는 즐거움을.
시간이 남더라도 공항에 미리 도착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한 시간 남짓,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Y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걸로 부족했는지 턱까지 모자를 내려 얼굴을 가렸다. 드러난 뒤통수에, 기우는 햇살이 비쳐 짧은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공항에 도착해 차를 반납하고(그때는 공항 주차장 한 켠에서 렌터가 인수, 반납을 하던 시절), 카트에 여행가방을 싣고 Y도 그 위에 앉혔다. 웬만하면 괜찮다고 했을 테지만, 카트에 앉은 채 Y는 주차장에서 수속데스크까지, 카트 손잡이를 꼭 붙잡았다. 무사히 수속을 마치고 출발만 남겨둔 시간은 여유로웠다. 어느 정도 통증이 가라앉은 것일까. Y가 걸을 수 있겠다고 했다. 한 발 한 발, 발을 내디디며 웃는 얼굴이 좀 전과 확실히 달랐다. 살았구나, 진짜 다행이다 싶었다. 잠깐 일시적 현상이었나 보다, 무지 몽매한 소리를 위로랍시고 건네는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Y가 내 팔짱을 끼며 오늘 선배님 생일인 걸 잊었다면서 아직 지나지 않았으니 면세점에서 선물을 사주겠다는 것이다. 오, 이런 떙큐 스러운 일이. 2박이 헛되지 않았구나, 내가 Y를 몰랐던 거지. 그치, 얘가 그럴 애는 아니잖아. 속 넓은 선배가 나타나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한번 볼까 그럼? 우리는 한 쌍의 다정한 선후배가 되어 팔짱을 낀 채 면세점으로 들어갔다. 둘이라 일단 더 뛰고 보는 두 딸들을 남편들이 쫓아다녔다.
립스틱, Y는 내게 립스틱을 골라 보여주며 말했다. 선배님 이거요, 이거 한번 써보실래요? 립스틱은 세 개가 한 세트였다. Y는 케이스를 열어 하나를 내밀며, 제가 딱 보니까 선배님은 이 색이에요. 제가 사 드릴께요. 계산을 마치고 포장을 뜯더니, 셋 중에 정확히 그 하나를 딱, 내미는 거였다. 세트를 주겠거니 생각했던 속 넓은 선배는 다시 속 좁은 선배가 뒬 수밖에. Y는 그 색이 나에게 잘 어울리는 색이라며, 펄 감에 누드 톤이라 지금부터 여름 내내 부지런히 바르길 바란다고 꼼꼼한 조언과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그 자리를 빠져 나왔고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김포에 내려 한 동네까지 온 다음, 각자 집으로 헤어져 들어갔다. 2010년 내 생일이 15분 정도 남아 있었다.
립스틱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여름에 잘 어울렸고, 발색도 향도 다 좋았다. 워낙 화장을 잘 하지 않아서 매일매일 그걸 쓰진 않았다. 아껴 바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안 쓴 것도 아니었는데 가을 지나 겨울이 오고 있는데도 립스틱은 거의 그대로였다. 겨울보단 확실히 여름 느낌인데다, 목도리며 머리카락이 입술에 붙는 게 싫어서 겨울엔 립 밤도 잘 안 바른다. 여름은 내년에 또 오니까, 그때까지 잘 두면 될 것이었다. 내년 이 맘 때, 아니 내년 딱 그 날 그 시간에, Y의 코 앞으로 이걸 흔들어 보이며 아는 체를 해야지. 같이 있던 나머지 두 개의 향방도 반드시 물어보아야지.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Y는 해가 바뀌자마자 우리 곁을 떠났고, 립스틱은 그보다 오래, 꽤나 오래 남았다. 우리 관계가 얇팍해 지는 건 아닐까, 퍽도 사치스러운 걱정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얄팍해 질 수 없는 관계에 이미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발바닥이 아파서 걷지 못하겠다던 그 말이 있기 훨씬 전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