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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 북촌리에살아보았어요

by 유니크한 유니씨



있는 동안 흐트러짐 없이 좋았다. 서울을 떠난 가을이 여기 머물고 있었다. 낮 기온이 20도를 넘어선 덕에 맨투맨 하나로 충분했고 어떤 시간에선 살짝살짝 에어컨을 켜기도.


선명한 한라산 능선과 어여뿐 달님을 여유롭게 응시하며 다음 동선을 밟는다. 깜깜한 마을 길을 통과하여 비로소 닿은 포구, 그 수평선에 내려앉은 붉은 기운에 눈물이 찔끔 나왔을지도 모른다. 못 보면 어떡하지? 갈 때마다 조마조마하게 되는 냥냥들도 하나 둘 무사했고, 어서옵쇼~ 가져간 닭가슴살을 진상했다.


느려도 되는 만찬을 펼쳐놓고 막차 시간 따위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약간 비현실적인 오밤중을 보낸다. 마당에 내려서면 저러다 '별 내려온다~' 싶게 쏟아지겠는 별밤은 확실히 포근했다.



바람과 억새, 투명하게 파란 하늘은 오름 내내 눈과 귀에 들어왔고, 꼭 같이 먹고 싶던 비건식도 만족 그 잡채.

면 만큼 다양한 채소가 풍요로운 오일리리 파스타, 두부 좋아하는 취향을 버전 업 시켜준 결두부 요리까지.

나름 두부순이로 자부하는 중인데 결두부 영접으로 우리의 두부력 질적 팽창! 식당 한켠 서가에서 애정하는 김지승 작가를 만난 것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식탁.





올 때마다 오고싶은 카페에 앉아있으려니 이곳을 처음 알게 된 2010년 여름이 떠오른다. 혼자 걷기보단 안고 이동하는 시간이 더 잦았던 28개월 아이와 함께였지. 요즘 나는, 어제 보다는 십 수 년~ 수십 년 전 기억이 어제 일 처럼 생생할 때가 많은데, 그토록 오랜 기억을 복기하다 보면 내가 진짜 오래 살았구나, 살 떨리게 느껴진다. 살 날 보다 산 날이 더 많은 앞으로는 과연, 내가 주도적으로 살아낼 시간을 얼마나 담보하고 있을까, 가늠할 순 없기에 아찔해지기도 하고.



하튼 그렇게 십수년을 이어가는 이 카페야말로 특유의 고유함을 유지하며 커피의 맛과 이름으로 초지일관인데 나에게도 그런게 있었나, 자괴감이 일지만 내일부터-12월 첫날이야- 다시 다져나가자, 가벼운 상념으로 일단 마음속에 킵.


좋아하는 평대-> 세화를 느긋하게 찍고 중산간으로 가는 길, 급브레이크를 밟게 한 반짝이던 노란 빛은 당분간 아니 웬만하면 오래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분명히 서울에서 밟고 온 은행잎인데 이처럼 나뭇잎으로 아직도 빽빽한 풍경이라니. 황홀하다는 뜻이 이런 건가 싶게, 그간의 삶에선 발화되기 어려웠던 단어들이 튀어나온다. 나무가 높아서인지 뻗어난 가지들이 잎맥처럼도 보인다. 하나의 거대한 잎이다. 와우 진짜 이건 아주그냥 오래 계속 봐야돼, 넌 어떻게 보여? 고개를 젖혀 마주한 은행나무가 다시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쯤.







책에 가까운 취향 따라 서점 세 곳과 읍 도서관을 소요하면서 혼자일 때보다 편안하고 고요한 느낌이 되어, 포구의 일몰과 그에 물든 구름, 때맞춰 등장한 달님을 마주하며 벅뚜벅뚜 하루가 저무는 소리들이 아깝지만 순응할밖에 어쩔수가 없다(영화 안 봄).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 걸어서 오름 하나 넘어 마침내 그 바다다. 잠시 할 말을 잃고 아니죠, 켤코 말이 필요 없는 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채우고 우리는 다시, 바다가 없는 저마다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있던 데로, 내 자리로 왔을 뿐인데 그곳이 생각난다고 또 문자를 주고 받으며 다음을 얘기한다. 우리는 이제, 이날들 전으로 돌아갈 순 없는 것이다, 확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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