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홍법과 임세원법을 통해 본 의인의 고난

by 전문상담사 이희

대학 때 한동안 일본인 작가 엔도 슈사쿠(1923-1996)의 글을 즐겨 읽었고 책상 한 귀퉁이에는 늘 그의 책 한두 권을 꽂아 두었다. 그의 글은 연약한 자, 부족한 자 그들도 그들 나름의 서사가 있고 그토록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는 연민스러운 시선을 보여주는데 나는 그것이 좋았다. 그의 책 『침묵』 에 등장하는 인물 기치지로. 그는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반복한다. 그는 과거에 배교한 경력이 있고 가족이 모두 순교했는데도 혼자 살아남기 위해 믿음을 버린다. 그리고 고해성사하고 또 배교한다. 그런 그가 “나는 약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나도 신을 믿고 싶습니다”라며 스스로도 복잡한 심경을 이야기한다. 엔도슈사쿠가 주인공 로드리게스 신부를 통해서 중심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지만, 작가가 진정 전하고 싶은 숨은 메시지는 로드리게스 옆에 있는 이 연약한 인간 기치지로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은 과연 이런 사람도 품을 수 있는가?” “내가 바로 흔들리는 인간, 연약한 신자가 아닌가?”

잊고 지냈던 기치지로를 기억에서 소환한 이유는 ‘의인의 고난’이라는 묵직한 주제 앞에서 한 없이 낮아지는 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성실히 살아왔고 자신도 의인의 반열에 들고싶었던 시절도 있었던 거 같은데 평범한 삶을 살기에도 이토록 연약하고 핑계가 많다. 그런 내가 의인의 고난에 대해 가타부타 글을 쓰는 게 송구스럽기만하지만 내가 연민하는 기치지로의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가보겠다.


의로움에 대해, 김관홍법

공자는 의(義)를 인간이 추구해야하는 최고의 덕목 중 하나라고 했는데 의를 실천하는 데서 비롯된 불이익이 고난이고 그 의로움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고귀한 삶이라고 보았다. 기독교에서 보는 의인의 고난은 단순한 불행이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다. 『이름이 법이 될 때』 김관홍을 통해 ‘의인’에 대해 생각해 본다. 김관홍법(민간잠수사 보호법 또는 세월호 구조활동 참여자 지원 법안)의 故 김관홍(1977-2016)은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잠수사였다. 진도 앞바다에 배가 침몰하고 수많은 국민이 깊은 슬픔에 빠졌을 때 그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구조작업에 나섰다. 의무도 국가의 요청도 없이 유가족의 고통을 스스로 나눠 짊어졌다. 그에게 의로움은 이론이 아니라 사비를 들여 장비를 마련한 것, 수중 작업 중 수십 구의 시신을 직접 건져 올린 실재적인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심각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와 심신의 질병을 얻었고 참사 2년 만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故 김관홍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명예나 배상 등의 보상을 생각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대신 짊어진 사람이었고, 죽음을 무릅쓴 헌신으로 침묵하던 양심을 일깨운 사람이었고, 제도적으로 준비되지 않았던 자리에서 고통을 감내한 사람이었고, 사회적으로 존중되고 구조적으로 지지받아야하는 고난을 당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혹한 위기 앞에서 용기 있는 개인에게 빚을 졌다. 그 용기는 외면받지 않고 보호받아야 한다. 남겨진 우리는 故 김관홍의 고난을 기억하고 그가 감당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사랑의 무게를 법과 제도, 공동체의 회복으로 이어가야 할 책임이 있다. 이것이 의인과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책임이고, 의인의 고난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기억의 제도화다. 이제 시작된 김관홍법이 의로운 사람들을 지켜내는 공동체법으로, 법을 진짜 현실로 이루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달려 있다.



임세원법을 통해서 본 의인의 책임

김관홍법의 김관홍을 통해 의인은 다른 사람의 고난을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임세원법의 임세원을 통해 그 고통을 책임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한지 생각해보려고 한다.

『이름이 법이 될 때까지』 임세원법, 정확히는 [정신건강복지법]과 [의료법]개정안은 정신질환자에 대한 조기 치료와 인권 보장, 의료진 안전 확보라는 두 목표를 동시에 담았다. 故 임세원 교수가 2018년 12월 환자의 흉기로 사망했고 그의 사망이 정신건강 시스템을 만들고 시행되는 데 1년이 걸렸다(2019년 12월31일). 법제화되는 데 비교적 짧은 시간이 소요된 것은 그동안 이 분야의 필요가 긴급했고 중요했고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이 법이 법제화되는 과정 중에 故 임세원의 유가족과 동료들이 보여준 사명감, 책임과 헌신은 정신질환자에대한 국민의 태도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우리 가족의 자랑이던 임세원 의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의료진의 안전이 지켜지고, 모든 사람이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 사회적 낙인 없이 적절한 정치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황망함은 그들 자신이 짊어지고 임세원의 죽음이 이 사회에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안전을 위해, 우울은 추모를 위해, 분노는 정신건강을 위한 시스템을 만드는 데 쓸게” 남겨진 동료친구 의료진들은 그들의 과제를 위해 묵묵히 현장에서 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현재 임세원법을 넘어 의료현장과 정신건강 분야에서 실질적인 안전과 인권은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도전 앞에 있다. 임세원법이 현실이 되기까지 보건복지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인권 논란에 대한 실제적인 이슈를 해결해 가도록, 시스템 절차의 복잡성을 해소할 수 있도록, 환자 보호자 사회 전반의 인식이 변화할 수 있도록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것이 의인의 고난 곁에 함께 사는 우리의 역할이자 책임이다.



의인의 고난과 모성(母性)

김관홍법, 임세윤법과 역사적 사회적 의인들의 이야기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또 생각한다. 의인의 고난이 보상을 바라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대신 짊어진 고난이라면, 의인에 대한 대중적인 이미지가 왜 이토록 남성적인걸까? 왜 여성의 고난에 대해서는 이토록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 축소해 이해하는가? 여성주의 신학을 본격적으로 배우지는 못했지만 여성의 고난이 그 자체로 신학적 역사적 해석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은 무척 안타깝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 안중근에게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아깝지 않다. 네가 항소하면 나는 너를 내 아들이라 부르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한 어머니 조마리아. 그녀는 독립운동가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이미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나 그녀는 안중근과 같은 민족적 의인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 그녀의 고난이 어머니의 고난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해석되는 부분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영화 <케빈에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는 어머니가 치뤄야하는 사회적인 고난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아들이 고등학교에서 대규모 학살을 저지른 후 어머니(에바)가 사회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난받고 자책하는 이야기다. 어머니는 아들의 죄로 사람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고 맞고 아들의 엄마라는 죄의 대가를 치른다. 죄 없이 죄를 짊어진 모성이다. 어머니는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사랑, 아들의 행위에 대해 사회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존재, 이해와 용서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존재,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하는 고난을 짊어진 존재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고난의 다수는 이런 이름 없는 여성, 특히 모성애를 품은 여성의 몫이었다. 탈북 여성들 역시 그렇게 살았다. 목숨을 걸고 탈북하고 자녀를 위해 다시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남한에서도 차별과 침묵의 경계에서 견딘다. 그들자신은 북한태생이지만, 중국에서 태어난 중국인 자녀의 어머니이고, 동시에 한국에서 자라는 한국인의 어머니다. 이런 다중 국적 역할 구조 속에서 타인을 살리고 키우기 위해 자기 존재를 부정해야하는 사람들이다. 탈북 여성의 고통이 구조적 폭력 안에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이 겪는 고난이 타인을 위한 고통이고 생명을 위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결코 사적 영역에만 머물게 할 수 없는, 의인의 고난이라는 측면이 있다. 나는 여기에서 하갈을 본다.

여성, 모성의 고통은 추상적인 고통이 아니다. 실존을 뚫고 가는 고통이며 그 상처받은 몸으로 여전히 사랑할 책임을 다하는 것은 모성이라고해서 당연한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고뇌하고 몸부림쳤던 주마리아와 에바와 탈북여성과 이름없는 모성들이 짊어진 고난이 격에 맞게 해석되길 바란다.




책임의 시간

고난은 책임을 회피할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책임을 요청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김관홍법과 임세윤법에서 의인의 고난을 ‘스스로 타인의 고통을 대신 짊어진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게 됐다. 그 관점에서 나는 어떤 모성도 의인의 고난의 반열에서 이해되고 해석됐다. 때로 미디어를 통해 의인의 죽음을 목격할 때가 있었고 억울한 죽음이라는 표현으로 그 슬픔을 갈음할 때도 있었지만 나는 앞으로 ‘억울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의 선택과 결과를 감정과 상황으로 해석하지 않고, 그의 선택에 동행자가 되는 것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태도라고 생각했다. 또 우리 사회가 소수 의인의 고난에 너무 큰 빚을 지지 않기를 바란다. 의인의 고난 옆에는 다른 의인이, 그 곁에는 또 다른 의인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주면 좋겠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의 주인공 로드리게스 신부는 17세기 일본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기에 박해받는 신자들을 목격하고 자신의 신앙이 오히려 그들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박해받는 신자들 앞에서 신은 어떻게 아무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는가? 결국 로드리게스는 후미에(그리스도의 초상을 밟는 의식)를 밟는다. 그가 후미에를 밟고서야 고통받는 신자들은 놓여날 수 있었다. 외형적으로는 배교지만 다른 사람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는 인간의 자세에 대해 신은 어떻게 답할까. 엔도 슈사쿠는 자신의 고난 앞에서 타인을 위해 행동하는 것, 고난받는 자 곁에 서는 것, 타인의 고난을 함께 책임지는 것, 바로 그것이 신의 침묵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보여준다. 혹시 지금, 신이 나에게 침묵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책임져야하는 시간이기때문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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