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인 Z Jan 14. 2021

세상에 편한 삶도 있다는
어머니의 말

방향을 잃어버린 열정

'88만 원 세대', '신자유주의 1세대', '밀레니얼 세대'


급변하는 사회현상 속에 모두들 내 세대에 대해 프레임을 씌우기 바빴다. 

앞선 세대들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이기에 대안을 마련해주는 대신에 

비관론만 쏟아내었다. 

그러면서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며 '열정'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말하며 방관했다.

 

연애도 대학 가서, 노는 것도 대학 가서, 취미생활도 대학 가서,

모든 걸 대학을 들어간 뒤로 미루고 살기를 요구받았다. 

좋은 대학만 들어가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는' 말 따위를 들으며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거라는 기대를 안고 대학에 들어갔다. 


캠퍼스엔 그들이 말한 낭만 따윈 흔적도 없었다.

취업을 위해서 각종 스펙 쌓기에 열을 올려야 했다.  

세계는 점점 더 빠르게 변해갔다. 

그렇게 졸업 뒤에는 고학력 저인금 노동자가 되어 기존 질서 유지를 위해 열정을 불태워왔다. 


이제는 'Z세대 (1995년도 이후 출생)'가 화두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인터넷 세상에서 살았고,

펜더믹 이후에 급변하게 될 세상에 대해 이미 익숙하다. 

기존의 시스템에 들어가 착취를 당하는 대신에 '영 앤 리치'의 삶을 꿈꾼다. 

더이상의 인력의 충원없이 '밀레니얼 세대'는 끝없는 시스템의 굴레를 붙잡고 내면에서부터 무너져간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의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는 발언에 온갖 비난들이 쏟아졌었다. 

15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그의 말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이었다.

기득권들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세대들을 위한 새로운 삶의 방향과 대안을 마련하기보다 

기존 질서 체제가 무너질까 봐 전전긍긍했다. 


대학을 졸업 한 뒤 '사회생활은 다 힘들다. 버티는 놈이 이긴다'라는 말을 붙잡고, 

구체적으로 무엇이 힘들지도 모른 체 '열정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다'는 유노 유노의 말처럼 버텨냈다. 

그렇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10년을 버티고 

내가 더 딛고 올라가야 할 단계가 흔들려서야 정신이 들었다. 

분명히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도 읽었지만 

나는 내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다.

내가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 건 내 열정의 부족함이라 나를 나무라며  

버티다 버티다 영화계를 탈출하는 사람을 낙오자 취급을 했다. 

그 어느 마조히스트보다 삶의 고통을 성공으로 향하는 길이라 착각하며 보냈다. 


열정을 비하하는 건 아니다. 

다만 방향 없는 열정은 더 빠르게 나 자신과 멀어진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이제 내게 남은 건 철마다 돌아오는 비염, 때 되면 저려오는 무릎과 손목의 관절염, 그리고 흰머리뿐이다. 

"언니, 이제 연출부 할 몸이 아니에요"라는 친구의 말에 같이 웃었지만 무서웠다. 

나에겐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서 나를 성찰해야 할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것의 결과가 이 시스템에서 영화를 만드는 걸 포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알고 있었다. 

내 일기장의 수많은 문장들이 현실의 괴로움을 토로하며, 

대안적인 삶에 대한 꿈을 꿨다.

다만 내가 무시하며 버텨왔을 뿐이다. 

팬더믹의 상황이 나에게 강제적으로 생각의 시간을 마련해 주었고, 

내 의지보다 더 빨리 그 굴레에서 내려오게 하였다.  


세상에 편하게 사는 삶이 있다는 어머니의 말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나에겐 그건 무슨 패배자 낙인을 찍는 것 같았다. 

그때 어머니가 제시한 대안이 뻔하게도 결혼이었다. 

본인은 평생을 일과 가사를 병행하며 독립적으로 사셨지만, 

딸인 내가 가사만 돌보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정말 아이러니다. 

어쩌면 어머니 세대에서는 여자가 일을 하려면 가사까지 완벽하게 해내야 하니 

그런 이중 고통을 겪을 바에는 가사 노동만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셨을지도 모른다. 


요즘에 와서야 비혼으로 혼자 삶을 개척하는 선택지도 존중을 받기 시작했지만, 

어머니 세대가 비혼을 선택지로 생각하지 못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당시 나에겐 빛나는 레드카펫이 기다리고 있는데, 

평범하게 애나 낳고 살라는 어머니의 말이 모욕처럼 느껴졌다. 

몇 년은 그의 말에 발끈했고, 최근의 몇 년은 더 영악해졌다.

그동안 나에게 투자한 학비와 내가 감독이 되겠다고 버틴 10년의 세월이 아깝지 않냐며 

말도 안 되는 경제의 논리로 설득했다. 

최근 몇 년 간 어머니는 더 이상 나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애먼 놈 만나서 뒷바라지하는 삶을 살 바에 혼자 사는 게 낫다는 아버지의 말을 전하며 일단락이 되었다. 


표현이 달랐을 뿐 부모님의 바람은 늘 한결같았다. 

내가 내 스스로 앞가림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건 나의 욕망이었을 뿐이다. 

나 스스로 그들이 그걸 원한다고 가정하고 달려갔을 뿐이다. 

지난 10년 동안 영화를 한다며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일년에 한 번 때론 두 번 명절에만 찾아뵙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내가 그런 삶을 사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학창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들의 결혼식도 가지 못했다.  

인생의 의미있는 순간을 다 놓쳐가며 

다가 올지도 모를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는 삶을 과연 누가 응원할 것인가? 

내가 좋아했던 외숙모의 장례식에도 가지 못했다.

아니 돌아가신 사실도 1년이 지난 뒤에야 들었다. 

어차피 촬영하느라 오지도 못하니 맘이 쓰일까봐 못 전했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오열했다. 


이런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는 삶이라는게 과연 그렇게 영광스러운 것인가? 

이건 정말 누구를 위한 삶인가? 

이건 과연 누구를 위한 삶인가?

방향을 잃은 열정은 망망대해에서 무한정으로 표류하게 할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샤이 진보라는 경상도 아버지의 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