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인 Z Jan 29. 2021

Since 2021

포스트 코로나 어떻게 살 것 인가?

일단 영화계를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이 최근에 한 가장 큰 결정이다. 

관두면 큰 일 날 줄 알았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시국에 오히려 더 많은 제안을 받았다. 

일일이 그들에게 해명하는 와중에 나의 결심은 더 단단해져 갔다. 

연락이라곤 잘 안 하는 사람이었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여기며 살았는데

먼저들 연락이 왔다. 

많이들 불안한가 보다. 

오히려 그 속에 있을 때 보다 더 많은 내부 사정들을 전해 듣게 되었다. 

우주의 기운이 나를 향해 쏠리는 기분이 이런 건가? 


한 분야를 오래 파고 스스로를 잘 착취한 사람에게 훈장처럼 권위를 준다.

그 사람 말고는 다 입 닫아버리는 문화 자체가 불편하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 권위를 쉽게 얻으려는 사람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우린 어쩐지 권위 있는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떠들면 

그걸 얌전히 앉아 듣는데 너무 익숙하다. 

그러니 아무리 읽고 듣고 하여도 생각의 발전이 없고, 

권위에 취약하며, 

그 틀을 깨려 하는 사람에게 정말 야박하게 군다. 


본인이 쌓아 올린 지식과 문화적 배경으로 대화하고,

그 와중에 더 좋은 지식을 깨달으면 그걸로 충분히 즐겁고 유익할 텐데

아니 왜 다들 재미있게 배우는 거에 대해서 인색할까?

종이에 끄적이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불성실하다고 생각하기 일 수다. 


공부란 모름지기 허벅지를 찔러가며 힘들게 배워야 제 맛인데, 

어느 날 갑자기 놀면서 뭔가를 배우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배우는 도중에 그걸 나누면서 수익도 만들어내고 

함께 나누면서 성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다들 배가 아픈 것 같다. 


아니 저런 걸로 돈을 번다고?


진정한 집단지성의 시대가 열렸다.

아니 이미 존재한다. 

내가 관심 가지지 않아서 그냥 없는 세계로 치부할 뿐이다. 

모두가 각자가 가진 장점이 있고, 

그걸 교환해서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새로운 물물교환 시대의 도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리하지 않고, 즐겁게 사는 와중에 생기는 소소한 잉여생산물만 나눠가져도 

살 수 있는 세상이 진심으로 가능할 것 같다. 

가짜 정보나 지식의 왜곡에 취약하다고들 하지만

권위에서 만들어낸 지식의 불균형 또한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정답은 없다. 

그동안 후발 주자였던 한국의 입장에서는 

이미 시행착오를 거친 선진국들이 있었으니 

그들의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정답이 앞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인류의 역사상 유례없는 상황을 겪으면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 시기가 그냥 지나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이제 진짜 너와 내가 함께 잘 사는 방법을 고민해봐야 할 때이다. 


진짜 나를 사랑하기 위한 걸음을 디딜 때가 왔다. 

그동안 내가 변하지 않았던 건 

내가 나의 인정이 아니라 남의 인정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렬히 광적으로 추구했고,

그런 인간이었다는 걸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 


버텨내라는 말들이 너무 무겁고, 

좋아하는 것들이 숙제처럼 느껴지는 일들이 숨이 막혔다. 

불안감을 떨쳐내려면 시선과 권위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유로운 영혼인 척이 아나라 진짜 자유 말이다. 

너무나 편집적이고 극단적인 나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때가 되었다. 

삐뚤어진 사람도 이 세상에 존재함을 알아야 하고, 

그게 바로 나다. 


힐링이라는 단어가 불편했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고, 

때때로 힐링하며 악착같이 버티고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합리화를 했다. 

그렇게 제대로 된 자기비판 없이 견뎌낸 사람이 괴물이 되었다. 

괴벨스를 보며 저게 가능한가라는 생각을 했는데..

나 같은 사람이 시스템에 비판 없이 열심히 부합하다 보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었고, 욕먹는 게 너무 두려웠다. 

무언가 정보를 습득하고 소화할 시간을 갖추기 못했기에 

유행에 민감하고 자극에 예민한 했던 것 같다. 

긴 줄에 서서 평가받기 위한 삶을 버리자. 

이미 다 이룬 사람들을 다시 불러와 경쟁시키는 것에 치를 떨자.

어쩌면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 짱돌을 들고나가 싸운다는 것 자체가 

기성세대가 혁명을 이뤄낸 방식을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만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환경에 너무 오래 지속적으로 억압받다 보니

정작 내 목소리를 내야 할 시점에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내가 바꾸고자 하는 걸 그들이 가장 잘 아는 무기로 들이대는 것 자체가 

창의력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매번 어설픈 반항은 더 큰 상처로 남아, 

더 쉽게 거기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길들이기의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제페토' '틱톡'을 보면서 내가 발도 못 들인 세계가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유튜브'도 작년 10월 이전엔 내게 없는 세계였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린 <레디 플레이어 원>도 어느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세계다. 

내가 고릿적 사고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쥐어짜고 기성 시스템에 대해서 불만만 토로할 동안 

어떤 이들은 가상 세계에서 캐릭터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도 감동을 느끼는데, 

3D 캐릭터를 가지고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다를게 뭔가?

내가 진짜 할 말이 있었다면 들려줄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단지 내가 레드카펫과 스포트라이트에 눈이 멀어있었을 뿐이다. 


내가 가진 예산안에서 들려줄 수 있는 곳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생겨나고 있었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매거진의 이전글 노마드의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