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인 Z Apr 19. 2021

넷플릭스 드라마 면접기

과도기 산업의 인권사각지대

하나둘씩 늘려가던 화분으로 어느덧 내 방은 놀러 온 친구의 표현대로 식물원이 되었다. 

아직 초보 집사라 물 주기에 대한 감이 없어서 

매일 같이 화분들 속에 손가락을 찔러 넣어 속흙까지 말랐는지 확인을 하고 물을 주었다. 

그러다 보니 늦게 일어난 대부분의 아침 시간을 식물을 돌보면서 보내게 되었다. 

귀촌에 대한 계획은 자금 문제로 잠시 미뤄졌지만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식물도 키우고 채소도 키우면서 

내가 이들을 돌보는 걸 즐거워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봄이 되니 정말 바빠졌고, 식물에게는 빗물이 보약이라는 말에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던 비 오는 날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몸이 바빠지고 공간이 달라진 덕분에 지난겨울 내내 찾아왔던 우울감이 많이 해소되었다. 

따뜻해진 날씨도 한몫을 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환경을 지배한다 착각하며 살아왔지만 

이다지도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나둘씩 벌여놓았던 부업들에선 이렇다 할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한곳에 집중해서 내 시간을 쏟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나란 인간은 어느새 또 불안감에 사로잡혀 

넷플릭스에서 들어가는 드라마의 '포스트 프로덕션 슈퍼바이저'라는 직책에 면접을 보았다. 

쌓인 경력으로 인해 당장에 줄어드는 잔고를 가장 빨리 채울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고, 

땅 구입을 위해선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자격도 필요했다. 

노력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굴러들어 온 자리라 운명인가?라는 생각도 했다. 

이리저리 합리화를 했지만 결국은 불안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나갔다. 


내가 지인을 통해서 이해한 '포스트 프로덕션 슈퍼바이저'의 업무는 후반 작업에 필요한 공정을 총괄하는 역할이었다. 촬영 현장을 나가지 않고, 후반 업체들과 함께 현장에서 넘어오는 소스를 관리하고 선 작업이 필요한 것들을 진행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플랫폼이기 때문에 자막 작업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촬영과 동시에 편집을 선 진행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감독은 편집이 다 된 걸 확인만 하는 면에서 한국 드라마 작업방식과 유사했다. 

지인이 같은 직책의 일을 한 적이 있었고, 현장을 나가지 않아도 되니 식물들을 키우면서도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면접을 보러 갔다. 


그동안 한국 영화 시스템에선 이 업무를 모든 촬영이 끝난 시점부터 시작했다.  

2시간짜리 영화를 만들 때는 후반 업체들을 그럭저럭 쥐어짜 내서 단 기간에 작업해왔기 때문에 

면접을 보았던 제작사 또한 이 역할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현장에서 조감독 업무를 맡던 사람이 후반 작업까지 이어서 했기 때문에 따로 뽑을 필요가 없는 파트였다. 

최근에는 조감독의 비싼 개런티로 인해서 스케줄 관련해서는 제작실장이 맡았고, 

문서 작업과 실무를 스크립터가 나눠서 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실 할리우드 시스템에선 감독이 편집권이 없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거의 모든 영화가 CG 작업의 비중이 높기 때문에

촬영과 동시에 후반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파트였다. 

최근엔 한국영화도 CG의 분량이 늘어나면서 3D 작업같이 공정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작업을 미리 진행하기도 했지만, 한국 영화 관행상 감독이 편집을 하면서 계획과 달라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후반 업체들은 편집이 끝난 시점부터 작업에 들어가길 원했다. 

어쨌든 작업을 진행하면 그들 입장에서는 비용이 발생한다. 

편집에서 없어지는 장면을 위해 작업하는 경우를 줄이고 싶은 건 당연했다. 

한국의 CG 퀄리티에 대해서 불만이 많겠지만, 

그들이 실력이 없는 게 아니다. 

디자인과 같이 창의력에 요구되는 시간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에 미적으로 떨어져 보일 뿐이다. 


면접은 한 시간이 넘게 진행되었다. 

많은 시간을 넷플릭스로 인해 바뀐 제작 환경의 변화와 

그에 따른 업무 이해도가 부족한 PD의 푸념을 들어주는 걸로 채워졌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넷플릭스와 잘 조율해서 이 파트에 대한 효율을 높여보자는 말 뿐이었다. 


PD와의 대화를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다. 


이 프로젝트는 원래 영화로 시작하였지만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기 위해 6부짜리 드라마로 이야기를 늘렸다.  

하지만 드라마로 생각하기보다는 6시간짜리 영화로 생각하고 만들 예정이다. 

중간에 편집을 진행할 일이 없으니, 나의 역할은 조감독이나 PS 개념으로 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영화 현장의 PS처럼 촬영 현장을 나와서 넷플릭스와 업무 소통을 하고, 

때로는 조감독의 업무를 나누고, 감독에게는 대면 보고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넷플릭스의 요구로 뽑는 인원이고, 업무 조율을 하는 포지션이니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아, 영화 업계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PS의 업무를 이야기해보자면 

투자사에서 현장 진행 과정에 대한 보고를 받기 위해서 파견하는 사람이다.

모든 업무에 적절한 감시와 견제는 필요하지만 영화 현장에서 PS는 '투자사의 스파이' 쯤으로 치부했었다. 

실제로 눈에 띄는 일을 하는 파트도 아니고, 본능적으로 사람은 누군가 감시를 한다는 걸 싫어하다 보니 그 파트에 대해선 놀고먹는다는 편견이 강했다.)


하지만 제작사에서 아무리 이 드라마를 6시간짜리 영화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넷플릭스의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지인에게 들은 이 포지션의 업무에 관해서 말했고, 

현장에 나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감독의 요구가 그러하다면 조율을 통해서 현장에 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물을 제때 주지 못해서 죽어가는 식물들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불편했다. 


본격적으로 PD는 내 이력을 보고 시킬 수 있는 일을 짜내었다. 

B팀 촬영 때 조감독과 스크립터 대신 나가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늘 하던 일이니 필요하다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해외 촬영이 있는데 최소한의 인원으로 꾸릴 예정인데 같이 가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연출팀 통역 겸 연출팀으로 일 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거였고, 

그렇게 일해본 경험이 있으니 가능하다고 답했다. 


지금 일하는 조감독이 후반 업무를 진행했으면 하기 때문에, 

촬영이 끝나고 한 달 정도 인수인계를 하고 그만두는 것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한 작품을 마무리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덕션 계약만 하고 후반은 그때 가서 PD님의 판단에 따르겠다고 했다. 


자신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파트에 돈을 지불해야 하니 

내 이력을 보고 뭐든 시키고 싶어 하는 PD의 마음이 보였다. 

그 PD를 탓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건 아니다. 

한 사람의 인건비가 낭비가 없기를 바라는 건 나도 원하는 바이다. 

하지만 공백이 생기는 인력의 모든 일을 해야 하는 불합리한 상황이 

불 보듯 뻔해 보였다. 


혹시 나 말고 다른 후보들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2명의 후보가 더 있다고 말했고, 

PD님의 필요에 맞는 좋은 사람으로 잘 선택하시길 바란다고 한 발 물러섰다. 


현장을 나가지 않고 쉽게 돈을 벌어 보려다 눈뜨고 코베이는 상황을 눈 앞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아, 남의 돈을 번다는 건 원래 이런 것이었지..라는 현타와 함께 

이 모든 게 한 사람에게 요구해도 되는 업무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그 PD는 다른 사람을 선택하였고, 나는 안도했다. 

다시는 조직에 들어가서 일하는 건 꿈도 꾸지 말아야겠다는 강한 동기부여를 얻었다. 


과도기의 산업에서 새로 탄생하는 직종의 업무 범위와 책임은 명확하지 않기 마련이다.

그날 나는 특별한 악인이 없어도 시스템의 공백으로 인해서 인권이 무너지는 사각지대를 보았다. 






이전 17화 패러다임의 전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