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글쓰기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작가가 무언가를 쓰기 위해선
세상과 인간의 대략적인 모습을 파악할 정도는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독서와 자기 관찰이 필수다."
어느 작가가 인터뷰를 하면서 했던 말이고, 이 말은 내게 족쇄가 되어서 20대의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나의 경험은 일천했고, 독서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만큼 똑똑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갇혀있었다.
그러는 동안 책과 영화는 많이 보았다.
다만 책을 사회과학서나 정치, 인문, 철학서 위주로만 보았다.
안 그래도 공감 부적격자에 이성적인 사람이 이성을 채우기에만 급급했다.
영화도 감독이 전달하는 메시지보다는 연출의 관점에서 보았고,
장면 구성이나 촬영 기술적인 레퍼런스로 보는 훈련만 주구장창해왔다.
뻔한 감동이나 교훈을 주는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시시하다 여겼다.
말 그대로 지적 허영만 가득 찬 직업병자였다.
더구나 가장 필요했던 자기 관찰을 하지 않고 영화계라는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면서 보냈다.
어떤 툴을 배운다는 건 그 툴로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서이지만
그동안 나는 영화 만들기만 열심히 익히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점은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더 나아가야 할 불완전한 존재라 여기며 만족하지 못했다.
사회나 정치 현상에 관심이 많았고, 내 속에 옳다고 정한 정치적 입장과 정의를 대변하기 위해 애써왔다.
대학생 시절 김규항을 몰랐던 나를 무식하다 말했던 지도 교수의 평가에 오기가 생겨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감독이 되고 싶었는데 정작 정치인이 되고 싶었던 것처럼 그래 왔다.
영화를 관두기 전 각색을 맡겨둔 시나리오는
내가 정한 절대선이었던 한 아이의 시점으로
마을의 부조리에 휩쓸려 다니다가 결국은 그 아이가 마을을 떠나는 걸로 마무리를 지었었다.
그땐 아이의 모습에 나를 투영하며
나는 사회에 적응하려 노력했지만 니들이 너무 썩어있고, 그 속에서 나까지 나빠지고 싶지 않다.
그러니 도망치는 나는 비겁한 게 아니다. 뭐 이런 마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각색을 못 끝내준 작가에게 감사하다.
아마 난 그걸 어떻게든 투자받고 메이드 시키려 애쓰다가 몇 년을 보냈을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변해가는 시장 상황도 파악하지 못한 채
OTT 시장은 곧 저물 것이니 버티자고 했을 수도 있다.
줄어가는 잔고를 걱정하며 수많은 타협을 하며
생계를 위해선 내 영혼을 팔고도 괜찮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운 좋게 그 시나리오가 잘되었다고 해도 나를 파악하기 위한 시간을 갖지 못하거나
더 돌아가기 어려울 때 자괴감에 빠졌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아니면 평생을 자신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어딘가에 한 구석이 구속된 삶을 살다 <스토너>처럼 후회로 눈을 감았을지도 모르겠다.
바뀌기로 한 결심과 계기는 다양했지만
행동에 변화를 준 건
내가 견딜 수 있는 임계점이 넘어서 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중에 한 영화에서 만난 감독이 내 삶의 일부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는 늘 ‘열등감’과 ‘죄책감’이 자신의 글쓰기 동력이라고 말했다.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내면의 상처를 해소해 왔다는 그의 말은 내 머리를 울렸다.
난 한 번도 글쓰기를 그런 식으로 접근해 본 적이 없었다.
내 인생에 가장 크다고 생각했던 것을 놓아버리고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난 7개월을 돌아보면 거짓말처럼 많은 게 바뀌었다.
아침마다 그날의 나의 감정을 돌아보고 쓰는 글쓰기를 즐기게 되었고,
글을 읽거나 길을 걷다가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핸드폰으로 메모를 했다.
그게 쌓이거나 더 생각이 발전되어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정리를 해서 브런치에 올렸다.
글을 쓰기 위해서 억지로 엉덩이를 붙이고 쓸 필요도 없었다.
하루키가 말한 것처럼 '라이터스 블록'을 모른다는 감각도 알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면 글쓰기가 싫어진다.
초등학생인 내가 글쓰기를 싫어했던 건
그 시절의 대부분의 글쓰기가 검사를 받았기 때문이고
혹시나 내 생각이 틀리면 어쩌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글 쓰기를 싫어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건데 그땐 몰랐다.
성인이 되어서도 글을 쓰지 못한 건 내 글이 투자를 전제로 써야 하는 글이라 쓰지 못했다.
나는 평가받는 게 너무나도 두려운 사람이었다.
며칠 전 브런치의 글이 일기장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 메인으로 올라간다고 불평하는 글을 보았다.
클릭을 유발하는 제목으로 낚아서
남을 혐오하고 용기를 잃게 만드는 글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뉴스나 기사로 충분히 혐오를 학습하고 있는데,
기자라는 분이 이 플랫폼까지 그렇게 사용하는 걸 보고 절망스러웠다.
나는 브런치가 그런 공간이라서 좋다.
완벽하지 않아서 좋고,
그 완벽 때문에 발행을 미루던 나보다 미숙하지만 용기 내어 발행한 내가 좋다.
부족한 나를 내보였는데 그토록 두려워했던 비난이 아닌 공감을 받았고
거기서 다시 힘을 얻어 좀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게 좋았다.
전문적인 퇴고나 편집을 거치지 않은 글들이 부족할지 모르지만
용기 내어 올린 다른 작가들의 글과 감정들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누구나 자신에게로 가는 과정은 험난하고 힘들다.
이 플랫폼이 사람들로 하여금 글을 쓰면서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면
이미 충분한 가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격려하고 다독이며
타인의 삶과 내면을 간접 경험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넓혀간다며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오탈자도 없고 자격까지 갖춘 훌륭한 글을 보고 싶다면
편집과 교정을 거친 훌륭한 책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니
돈을 내고 구입해서 읽으셨으면 좋겠다.
카카오에서 광고도 없고 아직 수익 모델이 없는 브런치를 계속 유지하는 이유는
결국 플랫폼도 질 좋은 글을 꾸준히 쓸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해서일 것이다.
플랫폼의 경쟁력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숫자와 좋은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렇게 모은 작가들로 글 구독 서비스를 만들어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게 아니라도 브런치는 어디에서도 잘 드러내지 않는 개인들의 속마음 데이터를 모으기 가장 좋은 형태이다. 누군가의 일기장을 보기가 그리 쉬운 일인가?
AI의 학습 데이터나 정신 분석 연구 자료로도 활용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모든 게 디지털화되는 시대에 이렇게 쌓이는 모든 글이 자산이 된다.
누군가의 글의 가치를 쉽게 평가절하할 이유가 없다.
한국인의 교육환경에서 높은 확률로 장문의 글을 쓰는 훈련을 거친 사람들이 적을 것이다.
오히려 사 기업이 글쓰기 훈련을 시키는 셈이니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다.
내 개인적 경험에 비추면 비판의 글보다 따뜻한 댓글에 오열했고,
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한 댓글이 지속 가능한 글 쓰기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니 정말로 브런치 플랫폼의 발전을 원한다면
혐오의 글로 다른 이들의 기를 죽이지 말고 부족한 서로의 글을 보듬어 주자.
서로서로 하트를 눌러주며 연대해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