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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인 Z Aug 25. 2021

불안을 느끼는 과정

국가는 내가 성실한 노예가 되기를 원했다.

퇴사(?)를 결심하고 다시는 영화판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을 가지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온갖 주파수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내 마음이 주는 신호를 따르며 나를 사랑하기란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며 명상하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갑자기 넘쳐나는 시간에 당황을 하며

의미 있는 무엇으로 그 시간을 채워야만 할 것 같아 조급해하는 나를 도와주기로 했다.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미뤄두었던 것들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이 드는 가구 만들기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올해 초에 귀촌을 하고 자급자족하는 삶을 꿈꾸며

가구도 스스로 만들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알아보긴 했었다.

3개월 과정 동안 배울 수 있는 건 스툴 같은 소가구였고, 한 달에 50만 원 정도 들었다.

책상 같은 걸 만들려면 9개월을 배워야 가능했다.

거기에 부가세, 목재, 부자재, 수공구, 마감 오일은 별도로 비용이 들었다.

들이는 비용만 계산하면 필요한 가구를 사서 쓰는 게 합리적이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대출을 위해 한 작품 정도는 더 할 의향도 있어서

긴 시간을 할애해서 시작하기가 망설여졌었다.


이제 시간의 벽을 겨우 넘었는데,

비용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국민내일배움카드' 로 배울 수 있나 알아보았더니

노원과 일산 쪽에 6개월 과정의 가구제작 코스가 있었다.

국민취업지원제도를 통해서 교육을 받으면

한 달에 일정 정도의 수당을 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보고 인터넷으로 신청을 하였다.

2주 정도 시간이 지난 뒤 국가에서는 나를 취업 취약계층 중 저소득 구직자로 판단하였고,

국민취업제도 1 유형으로 분류를 해주었다.

1 유형은 6개월 동안 구직촉진수당으로 한 달에 50만 원씩 지원을 받게 된다.


갑자기 많은 돈을 들여서 배워야 할 걸 국가에서 비용도 대주고, 수당도 받는 상황이 되었다.

고용보험료를 내기 했지만 이렇게 돌려받게 되다니.. 감개무량했다.

세금 내는 걸 아까워하진 않았지만 직접 혜택을 받고 보니

더 많은 복지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난 뒤 상담사와의 면담이 잡혀서 종로에 있는 고용보험센터로 갔다.

상담사는 내 취업의지와 이 수업이 앞으로의 취업계획에 어떻게 반영이 되는지 알기 원했다.

미래에 대해 계획 없이 살자고 마음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성실한 노예로서 나의 의지와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상담사는 취업역량과 내 적성을 파악하는 각종 검사를 진행 한 뒤,

학원에서 수강 내용에 대한 상담을 받고 내 성향과 맞는지 적성 검사를 한 표를

상담사에게 제출한 뒤, 수강 신청을 하길 원했다.

하지만 내가 신청하고자 했던 가구 수업은 당장 1주일 뒤에 개강이었고,

다음번 수업은 6개월 뒤에 예정되어있었다.

그는 원칙대로 하고 싶은 마음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갑갑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50만 원 수당이 나를 속박하는 기분이 들어 받지 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밖으로 나와 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이미 수강인원이 다 차서 대기인원으로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대기인원이 되려면 학원으로 가서 면접을 봐야 했다.

오늘 당장 면접을 봐야 한다는 말에

 길로 바로 노원으로 갔다.


1차로 행정을 담당하는 직원과 상담을 했다.

가구제작은 대부분 남성을 선호한다는 말을 전하며 여성이 취업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6개월을 배워서 창업을 하거나 디자인 쪽으로 취업하기는 무리이고,

처음엔 배송과 설치 위주의 일들을 하며 경력을 쌓아야 하기에 힘들다는 말도 했다.

각종 부정적인 말을 듣고 인적사항을 채우며 내가 지금 여기 왜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2차로 원장과 면접을 했다.

그는 정반대의 말을 했다.

4차 산업혁명시대에 가구 조차도 기계가 다 만드는 세상이라 숙련공의 필요도가 점점 줄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는 점점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목공에 대한 기초상식을 묻는 테스트를 보았고,

지난 3개월 동안 우드 카빙을 하면서 배웠던 게 도움이 되었다.

테스트를 제출하고, 상담사에게 제출할 적성검사표를 달라고 말했더니

수강신청을 해야 줄 수 있다고 했다.


상담사가 퇴근하기 전에 상황을 보고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학원으로부터 들은 정보를 전달했고, 면접을 보았다고 전했다.

그는 학원 쪽이 왜 그렇게 처리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섰는데

어느새 배가 고파졌다.

노원역 근처에서 파는 복숭아가 탐스러워 보였고 가격도 우리 동네보다 저렴했다.

소박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에 열심을 다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나머지는 운의 영역이었지만

싸게 산 복숭아를 집까지 들고 가는 수고로움 떠올리며 그제야 마음이 상했다.  


켄 로치 영화에서 흔히 보던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노동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일배움카드' 발급은 미리 해둬서

두 기관 간의 업무 처리방식만 합의가 되면

당장 수강 신청은 할 수 있었다.

'내일배움카드'는 바리스타 교육을 받기 위해 신청했었는데,

귀촌이 미뤄지면서 수업은 듣지 않았다.

커피나무를 키워서 커피도 자급자족을 시도하겠다는 계획도 있었다.

3년이 지나야 열매를 맺는다는 말에 지난겨울에 구입한 1년생 커피나무 5그루가

방구석에서 꿋꿋이 자라고 있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커피나무를 보다가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진 않았다.


"마음이 현재에 있어야 행복하다. 마음이 과거에 있으면 후회되고, 미래에 있으면 불안하다"


겨우 일어나 이 말을 일기장에 쓰고, 복숭아 하나를 깎아 먹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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