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배려로 느낀 고마움
잃었던 정신이 돌아오며 작은 소리들이 어렴풋이 들려온다. 정신은 몽롱하지만 사방이 고요하여 아주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는다. 어두운 곳에서 눈을 감았는데 눈꺼풀 위로 희미하게 빛이 느껴진다. 방 안의 공기를 느끼고 싶어 코로 숨을 크게 들이켠다. 코를 통해 들어온 공기를 가슴과 배를 부풀려 몸에 가득 담아본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공기가 왠지 모를 신선하다. 어떤 냄새라도 나면 좋으련만 코는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한다. 오랜 시간 익숙하게 맡아온 방 안의 공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작은 소리와 눈꺼풀 위의 희미한 빛, 들숨과 날숨의 교차로 생명의 불꽃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음에 안도한다.
여느 때와 같이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느라 이마에 주름이 진다. 기어이 눈을 뜨고 풀린 눈동자에 힘을 주어 초점을 맞춘 후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려 머리맡에 놓인 시계를 바라본다.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시각이지만 사방은 제법 밝다. 그러나 서두를 필요는 없다. 오늘이 휴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서둘러 이불을 박차고 나오지 않아도 되는 여유를 깨닫고 이내 이 여유를 이대로 만끽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이마에서 힘을 빼고 눈꺼풀이 다시 두 눈을 덮도록 놓아둔다.
일주일의 고단함이 하루아침의 늦잠으로 모두 해소될 리 만무하다. 하지만 휴일 아침의 여유가 주는 달콤함을 진정 기쁜 마음으로 즐긴다. 게으름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하루아침의 적당한 늦잠은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치유하는 마법이 된다. 물론 이런 휴일 아침의 늦잠을 게으름이라고 귀엽게 말하곤 하지만 정작 게으름과는 명확하게 구분된다. 어쩌다 한 번 누리는 단잠의 즐거움과 평소에도 수차례 반복되는 게으른 습관이 똑같을 리는 만무하다.
휴일의 아침, 고단했던 몸과 마음이 한결 여유롭다. 비록 일상이 고난과 피로로 뒤덮이지 않았다 할지라도 휴일 아침의 여유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을 선사한다. 이 여유가 단지 아침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더욱 흥분시킨다. 하루 종일, 또 하루가 아닌 이틀이나 나에게 주어진 여유가 너무나 반갑고 고맙다. 심지어 사람들은 금요일을 '불타는 금요일'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며 즐겁고 행복한 오후 시간을 보낸다. 다음날이 휴일이라는 사실로 해방감과 자유를 느낀다.
우리의 삶에 거대한 행복은 매일 찾아오지 않는다. 일상 속의 작은 행복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인도한다. 큰 행복에 기대어 자신을 둘러싼 일상의 행복에 감사하지 않는다면 아마 많은 시간을 불행 속에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큰 행복이 행운처럼 찾아오기를 기원하며 마치 네 잎 클로버를 찾는 마음으로 세 잎 클로버가 지천인 풀밭을 뒤진다. 토끼풀이라고 불리는 클로버는 원래 줄기를 따라 잎이 한 장씩 어긋나기 형태로 자라는데, 줄기의 끝에 보통 세 장의 잎이 한꺼번에 달린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런데 만 분의 일이라는 매우 낮은 확률로 줄기의 끝에 한 잎이 더 달려있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희귀한 네 잎 클로버를 행운의 상징으로 여긴다. 그만큼 삶에 행운이 깃들기를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흔한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희박한 행운을 찾기 위해 우리의 수많은 행운을 짓밟고 놓치는 바보 같은 일은 벌어지면 안 된다.
작은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일이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세상에는 우주의 법칙을 제외하고 당연한 것은 없다. 우리 사회에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들은 구성원들의 문화와 관습, 윤리 등과 연결되어 당연하도록 약속된 것들이다.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떠들지 않는 것, 아무 곳에서나 생리현상을 처리하지 않는 것,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것, 빨간 불에는 멈추고 초록 불에 움직이는 것 등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가 문명사회화 되고 여러 사람이 모여 살면서 생긴 약속일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거나 법적인 책임을 지게 한다. 모든 구성원이 신뢰 속에서 약속을 지키며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행복한 일상을 위해 자신과 타인의 노력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존중과 배려라는 가치를 실천하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버스를 탑승하며 옆 사람에게 보내는 양보의 손짓, 붐비는 지하철에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기 전에 구하는 양해의 말, 공공장소 출입문을 지나며 뒷사람을 배려하는 행동,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머물던 자리를 깨끗이 정리하는 일 등, 이 모두가 남을 위한 일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위한 일이 된다. 누군가로부터 시작한 존중과 배려가 상대에게 감사의 싹을 틔우고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감동과 감사가 일상이 되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일상에서 다른 사람의 선의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누군가의 호의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 자신의 입장만 내세우는 사람, 양보하지 못하는 사람 등 수많은 경우를 모두 언급할 수 없다. 분명 누군가의 존중과 배려로 자신의 삶을 누리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 테지만 이런 사람들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존중과 배려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선의를 베풀었던 따뜻한 사람들의 마음을 차갑게 식혀버린다. 단순히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암세포가 증식하여 덩어리가 되듯이 이기적인 분위기가 퍼지게 마련이다.
진정한 어른이라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며 감사한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작은 행동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 세심하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올바른 생각과 가치관을 전수해 주고 모두가 서로를 위해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사회, 이상적이라고만 하기엔 너무나 당연하고 행복한 세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