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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공간에서 느끼는 어른의 자질

by 타조

어머, 세상에. 어쩜 저럴 수가.

입 밖으로 탄식이 쏟아져 나온다.


주말이면 도서관을 찾는다. 아늑하고 포근한 침대와 언제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집을 뒤로한다. 집 근처에서 달리기를 하다가 조금만 지치거나 힘들면 유약한 마음이 유혹에 빠진다. 하지만 마라톤 대회 중에는 평소 유약했던 마음도 굳건해진다. 시작부터 끝까지 명확한 코스를 이탈하여 중간에 그만두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하다. 달리기를 시작하여 끝날 때까지 중계 카메라에 잡히지도 않고 나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각자의 달리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마음이 불편하고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마음먹고 시작한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기 싫어서 애써 무거운 발걸음 옮긴다. 결국 결승선을 통과하면서 안도감을 느낀다. 준비가 부족했다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속상해하고, 어려웠지만 완주를 해낸 자신을 뿌듯해하기도 하며 만감이 교차한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생기지 않는 한 시작한 것을 매듭짓고자 한다. 그렇기에 도서관은 나에게 마라톤의 주로(달리는 길)와 같은 의지의 공간이다.


도서관에 들어서면 적당히 밝은 조명과 쾌적한 실내 공기가 나를 반긴다. 그리고 도서관에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 감돈다. 도서관에 방문하는 사람들의 목적이 비슷하기에 생기는 어떤 유대감과 질서가 그 안에 녹아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도서관에 대한 나의 태도가 다소 엄숙하고 진지하며 그 공간에 함께 머무는 사람들도 나와 비슷하다고 으레 짐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의 짐작은 사실이라고 믿는다. 도서관에 대한 믿음은 공간 자체에서 나오는 것도 있지만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사소한 말과 행동도 서로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이루어진다고 느낀다. 도서관은 그래서 나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다.


도서관은 성숙하고 지적이며 어른스러운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강요 없이 자의에 의해 방문하였으며 자발적으로 규칙과 질서를 준수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아니, 이미 그런 몸가짐이 습관으로 형성된 사람들이 이용한다. 그리고 이곳에 방문하는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도 도서관의 성숙한 문화를 배우고 익힌다. 책을 가까이에 두고 독서를 즐기는 습관뿐만 아니라 장소에서 풍기는 긴장감과 배려, 존중이 자연스럽게 몸에 스며든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단지 머물러 있는 시간뿐일지라도 민주시민이 갖추어야 하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에 서서히 젖어든다.


서가와 열람실이 따로 분리되지 않은 넓고 개방된 공간이지만 건물 내부는 누구 하나 큰 소리 내지 않는다. 가끔 들려오는 재채기 소리가 공간 전체에 평화롭게 울려 퍼진다. 그마저도 반복적인 재채기가 나올 것 같으면 입을 막고 조심스럽게 열람실 밖으로 걸어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암묵적인 약속의 무게감을 느낀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에 독서를 하는 구역과 컴퓨터를 이용하는 구역이 구분되어 있을 뿐이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설계된 노력이 엿보인다. 도서관 자체가 우리에게 안기는 안정적인 느낌이 이용객들의 자발적인 규칙과 질서 준수에 큰 보탬이 된다.


정면으로 보이는 커다란 창문은 건물의 북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햇빛 가리개가 없다. 그래서 시원하게 도서관 외부를 바라볼 수 있다. 글을 쓰다가 낱말을 고르거나 표현을 다듬으면서 창밖을 바라보면 가장 먼저 침염수인 잣나무가 보인다. 작년 가지에는 이미 벌어진 솔방울이 흙빛으로 벌어진 채 매달려 있고 올해 자란 가지에는 아직 여물지 않은 초록 솔방울이 매달려 있다. 살이 쪘던 겨울과는 다르게 몸집이 홀쭉한 참새 두 마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잣나무 가지에 앉아서 이리저리 사방을 둘러본다. 잣나무 아래 드리운 그늘 속 갈색 벤치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번갈아 앉아 여유를 만끽한다. 한가한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차량들에게서 여유가 느껴진다. 좀 더 멀리 높은 상가와 아파트가 보이고 더 멀리 하얀 구름과 푸른 하늘이 나머지 여백을 가득 채운다. 도서관에서 느끼는 안정감과 차분함이 나의 시선에도 머물며 창밖의 풍경조차 아름답고 여유롭게 느껴진다.


우리 사회를 커다란 도서관으로 확장해 보면 어떨까? 당연히 도서관에서와 똑같은 규칙과 질서를 사회에 적용하자는 말이 아니다.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도서관에서 느낄 수 있는 어른스럽고 성숙한 분위기를 사회로 확장해 보자는 말이다. 구성원 모두가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중하다. 가방의 지퍼를 열고 벨크로를 서로 분리하는 소리를 작게 내기 위해서 조심한다. 물건을 내려놓고 책장을 넘기며 걸음을 옮기는 동작까지 조심스럽다. 상대방을 배려하여 섬세하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공간을 어른스럽고 성숙하게 만든다. 그리고 누구나 이런 성숙한 마음으로 도서관을 이용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행동을 기꺼이 한다. 도서관의 사람들에게서 어른의 품격이 느껴진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 즉 섬세하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말하고 행동한다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도서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분 좋은 분위기의 원천이다. 결국 우리 사회로 확장되어야 하는 것은 서로를 향한 존중과 배려, 신뢰라고 할 수 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무책임한 방종과 자신의 권리만 내세우는 이기주의, 몰상식한 행태들이 개성이라는 가면을 뒤집어 쓰고는 존중받아야 할 대상처럼 여겨진다. 몰상식이 제대로 된 응징을 받지 않는다면 양심 있는 사람이 바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몰염치한 사회가 된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미성숙한 성인을 참 많이 목격한다. 고개를 가로젓게 만들고 탄식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몸만 크고 마음이 자라지 않은 성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숨이 나온다. 성인과 어른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직 어린 아이들이, 몰상식한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자신에게 더 편하고 유리한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가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에너지를 쏟아내야 할까?


어른은 품격이 있어야 한다.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성인이 된다. 하지만 품격을 갖춰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


사진: UnsplashEliott Rey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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