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조건
초록 잎사귀 사이로 눈에 띄게 새빨간 장미가 가득 피는 계절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만 계절이라는 낱말을 붙이기엔 조금 아쉽다. 계절보다 작은 단위로 벚꽃이 개화하는 시기, 장마철 등 시기와 철이라는 낱말을 쓰는데 이 낱말들보다 계절이라는 낱말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마음을 설레게 하거나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에는 이상하리만치 계절이라는 낱말을 붙이고 싶다. 시절이라는 낱말도 떠올려 보지만 시절은 색이 바랜 과거의 느낌이 짙다. 아름답고 화려하며 채도 높은 색상으로서의 현장감을 전달하기에는 시절이라는 낱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낱말이 가진 어감의 차이 때문 아닐까? 장미의 계절이라고 표현하면서 장미가 만개한 설렘을 나타내고 싶다.
장미의 시기, 장미철, 장미의 시절, 장미의 때, 장미의 시간 등 자신이 좋아하는 표현을 사용하면 된다. 표현의 이유를 미주알고주알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읽는 사람이 어떤 뜻인지 이해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표현 하나에도 석연치 않다. 나의 생각과 느낌을 자물쇠에 딱 들어맞는 열쇠를 꽂아 돌린 것처럼 정확하고 또렷하게 표현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기억의 구석진 자리에서 먼지가 쌓이고 빛이 바랜 상자처럼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을 떠올렸을 때 어떤 기억이 보관되었는지조차 희미한 상자를 다시 열어 당시의 생각과 느낌이 생생하게 떠올라 전율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 사진을 다시 보는 것처럼 생생한 과거 앞에서 지나간 세월을 까맣게 잊고 지금보다 젊었던 그때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장미의 계절. 우주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거대한 시간이 아니라 지극히 작고 개인적인 존재가 갖는 시간 속에서 나를 위한 계절을 만들고 싶을 뿐이다. 순환하는 계절처럼 반복되는 시간의 구조나 시작부터 끝나는 지점까지를 잇는 단방향 흐름의 구조 그 어떤 것으로 생각하던 자연의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이 뚜렷한 특징이 있는 시간으로 나의 인생을 기억하고 또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은 간절함이 있다. 너무나 아름다웠고 행복했지만 슬프고 아팠던 기억으로 남겨진 나의 시간들을 떠올렸을 때 빛바랜 무딘 느낌으로 추억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어떤 낱말과 표현으로 생각과 느낌을 기록할까?'와 같은 고민이 무의미하고 헛된 시간낭비라 생각하지 않는다.
계절이라는 낱말 하나에도 고민과 생각을 담으려 하는 나는 섬세하다거나 세심하다는 말을 평소에 많이 듣는다. 내 생각에도 나는 어떤 상황과 자극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대화를 나누는 상대의 표정이나 시선, 말투, 표현 등에 집중하면서 민감하게 받아들이고자 노력한다. 민감성이 떨어지면 상대와 상황에 제대로 몰입할 수 없다. 민감하게 정보를 수용한 후 생각을 다듬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낸다. 조심스럽기에 민감하지만 예민하지는 않다. 예민하다는 말은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는 뜻을 갖고 있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는 자극에 대한 반응이나 감각이 지나치게 날카로운 사람에게 덧씌우는 말이다. 섬세함과 세심함은 상대에 대한 고민과 배려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결국 사람과의 관계에서 민감하되 예민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능력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길러지지만 어떻게 교류하고 반응했는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는 바람직한 성인으로서 어른이라는 존재가 되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한 일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겠지만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에 더불어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린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올바른 생각과 행동에 대한 본보기가 되기 위한 첫걸음은 섬세하고 세심한 마음의 형성일 것이다. 그 안에는 따뜻한 배려가 빛나고 있다.
거리낌 없이 침을 뱉고, 거침없이 욕을 하고, 다른 사람의 물건에 쉽게 손을 대고,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아무 곳에나 쓰레기를 버리고, 담배를 피우고, 나이로 경험을 무시하고, 공동체 구성원의 역할을 외면하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섬세하고 세심한 마음을 배우고 익히며 타인을 이해하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어른이 된다. 곁에 본보기가 될 어른들이 많아야 한다. 섬세함과 세심함이란 결국 주변에 대한 관심과 사랑, 함께 교감하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 자신의 사랑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도록 고민한 후에 나오는 말 한마디, 표정과 행동, 선물, 편지를 떠올리며 우리 주변을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길 희망한다.
사랑의 마음을 실천하는 사람이 어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진: Unsplash의insung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