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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한 피해자 2

허탈한 분노

by 타조

좁은 세상도 한없이 넓어 보이던 시절. 매일 다니던 길 외에는 더 다닐만한 목적지도 없던 어린 날을 떠올린다. 경험과 지식은 우리의 생각을 잔잔한 물살에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한다. 가볍게 흐르는 물살에 우리의 생각은 이리저리 부드럽게 떠다닐 뿐이다. 경험과 지식이 쌓이면서 부드러웠던 물살은 어느덧 방향성이 뚜렷해지며 흐름도 빨라진다. 점차 굳어지는 확신의 물살을 벗어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면 삶의 가치가 확고해진다. 다만 거대한 장애물을 만났을 때, 그간 신념처럼 믿어왔던 생각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찰나의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물보라로 튀어 오른 대부분의 생각은 다시금 내려와 흐르던 물살에 재차 휩쓸릴 뿐이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 견고하게 자리 잡은 생각은 신념으로 굳어져 여간해서는 바뀌기 어렵다.


나의 어린 시절, 그땐 모든 어른이 나를 사랑하고 보살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들, 또는 처음 만나는 어른에게도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교 후 가방을 집에 놓고 놀이터와 골목길로 나섰다. 성별도 나이도 다른 동네의 아이들과 술래잡기, 무궁화꽃놀이, 말타기, 땅따먹기, 얼음땡 등을 하며 노는 것이 일상이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아이들의 집도 알게 되고, 자주 왕래하는 아이의 부모님도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아이가 없는 이웃들과도 동네 곳곳에서 마주치며 얼굴을 익혔다. 때로는 함께 놀던 아이의 집에서 간식을 먹기도 했고, 어떤 아이의 집에서는 종종 밥도 먹었다. 집집마다 하나씩 있던 집전화기로 전화를 걸면 함께 놀던 아이의 가족과도 안부를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때는 동네의 모든 어른이 부모님 같았고, 모두가 형제 같았다. 예의가 없거나 잘못한 일이 있으면 동네 어른들의 훈계를 받기도 했다.


함께 살던 할머니와 분리하여 살게 된 시절에는 시내버스를 타고 할머니댁을 다녀왔다. 초등학교 2학년 정도 되었을 때, 노선버스의 번호와 정류장까지 외울 수 있을 정도가 되자 부모님은 가끔 나를 혼자 버스에 태워 할머니댁에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 불안해했던 부모님도 내가 스스로 잘 다녀오는 모습을 몇 번 경험하더니 나중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초등학교 2학년 밖에 되지 않는 아이가 몇십 정거장이나 되는 거리를 혼자 왕복한다고 동네에 소문이 퍼지자 은근히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다 어느 날 늦은 시각에 버스에 탑승한 나는 버스에서 잠들고 말았고 버스 기사는 종점에 도착해서야 곤히 잠든 나를 깨우며 다 왔으니 내리라고 했다. 어둡고 으슥한 외곽 지역의 버스 종점은 어린 내게 재앙이었다. 심지어 나가는 방향의 버스는 이미 마지막 차가 떠나버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린아이가 돈도 없이 인적이 드문 밤거리를 훌쩍이며 걸어가는 모습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얘야, 이 늦은 밤중에 무슨 일이니?"

나에게 말을 걸어 준 낯선 아저씨. 생면부지 어린아이의 부모와 통화를 하고 택시까지 잡아 태워 보내준 어린 나의 은인. 당시엔 너무 어려서 할머니댁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아저씨에 대한 고마움보다 컸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때의 경험을 곱씹을 때마다 나에게 찾아온 기적에 감사한다. 그리고 나도 지금까지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많은 선의를 베풀어 왔다. 모든 어른이 아이를 잘 보살펴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딜 가도 무섭지 않았고 사람이 있는 곳은 모두 마음이 놓였다.


자전거여행을 즐겼던 대학 시절에 오토바이 여행객은 굉장한 충격이었다. 학비와 미래를 위한 저축에 심혈을 기울이던 내게 자전거는 현실을 철저하게 반영한 교통수단이었다. 궂은 날씨와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면 하루의 시작과 끝은 자전거였다. 그러다가 자전거의 폭넓은 활용을 고민했고 그 결과로 자전거여행을 계획했다. 캐주얼한 일상복에 침낭과 옷가지가 담긴 배낭을 멘 자전거여행은 고난의 여행이었다. 저렴한 생활형 자전거로 떠나는 여행은 젊은 시절의 에너지와 패기로 가능한 일이지 않았나 싶다. 밤이 되면 상가건물 복도나 기차역 앞 정자에서 신문지를 덮고 새우잠을 청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다. 우스꽝스러운 행색으로 일주일이나 걸려 도착한 여행지에서 반나절만에 오토바이를 타고 온 여행객과의 짧은 만남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이후에는 바쁜 일상에 치여 살면서 생활의 여유가 줄어들자 자전거여행도 오토바이도 잊고 살았다. 그러다 불현듯 일상이 무료해지고 삶이 기계적이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여유롭게 여행하던 오토바이 여행객을 떠올렸다. 고민할 것 없이 곧장 중고 오토바이를 구매했다. 운전이 익숙해지면 면허도 따고 고배기량 오토바이로 갈아탈 생각이었다. 중고로 구매한 오토바이는 청소년 시절 겁 없는 또래들이 굉음을 내며 아찔하게 질주하던 오토바이와 생김새가 비슷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세상은 아름답고 따뜻하다는 나의 굳은 신념이 흔들리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서를 이렇게 자주 방문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함께 취미를 시작한 동료와 교외로 드라이브를 떠나기로 한 날, 안전모를 들고 주차장으로 내려온 나는 있어야 할 자리에 오토바이가 없어 당황했다. 전날 바쁜 일을 처리하고 정신없이 귀가하느라 직장에 바이크를 놓고 왔는지 곰곰이 떠올려 보았으나 안전모를 보고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주변의 CCTV를 살펴본 후 나를 불러 자신들이 확보한 영상을 보여주었다. 새벽 다섯 시에 찍힌 영상에는 두 남자가 내 오토바이를 몰고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런 당혹스러운 일이 내게 일어났다.


이후 보름 만에 범인이 붙잡혔다는 사실과 함께 오토바이 상태가 무척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았다. 부랴부랴 방문한 경찰서에서 만난 경찰관은 범인이 청소년이며 여러 번 문제를 일으켜 지역 경찰 사이에서 유명한 아이라고 했다. 재차 일으킨 도난사건에도 아직 어린 나이기에 처벌이 미미했던 점과 보호자조차도 포기한 상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보호자의 연락처를 받고 싶었으나 개인정보라 받을 수 없다는 답변과 아이에게 배상을 받기 위해서는 민사소송을 진행하여야 하며 시간과 비용을 지불한 소송에서 승소한다고 해도 배상은 요원하다고 했다. 상심한 채로 건물에서 나와 경찰서 주차장에 세워진 오토바이의 처참한 몰골을 보는 순간 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순간 부서지고 찢기고 긁힌 오토바이와 나 사이에 허무한 바람이 스치듯 지나갔다. 분노도 스치는 바람을 타고 허탈하게 증발했다.


나는 아직도 그 아이들이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 모른다.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그때를 반성하며 지금은 잘 살고 있는지 여전히 형편없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며 살아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확실히 알고 있는 한 가지는 나와 그 아이들이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로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들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아직도 내 삶을 관통한 경험들을 통해 세상은 아름답고 따뜻한 곳이며 관심과 사랑이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난관에 부딪힌 사람을 감싸고 이끌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나의 신념이 사회를 지탱하는 보편적인 신념이라고 생각한다. 어른들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따뜻한 마음을 지금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신념처럼 믿고 살면 좋겠다. 사랑의 온기가 다시 사랑을 낳고 더욱 따뜻하고 포근한 세상을 나의 보금자리로 삼고 싶다.


사진: UnsplashMitul Gaj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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