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내 방의 책상 앞에 앉아 본격적으로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를 보고 있자니 2주 전의 시간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학교에선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시험을 치렀다. 내 가출 여행이 시험이나 공부에서 도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정신없이 기말고사를 마치고 학교의 일상이 시작되니 나와 친하지 않던 반 아이들은 나를 이상히 여겼다. 교회나 다니는 범생이가 무단가출을 한 것도 그렇고, 가출을 하고 돌아왔는데도 맞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당시 남자 고등학교의 실상은 처참했다. 담배도 좀 피고 지각과 결석을 밥 먹듯이 하고 안팎으로 싸움질을 하고 다니는 애들이 종종 가출을 했다. 짧으면 삼 사일, 길면 일주일을 넘기기도 했다. 내 기억에 돌아오지 않은 놈은 없었다. 그러나 걔들이 학교에 돌아오면 패턴은 똑같았다.
'야. 너 ㅇㅇㅇ! 앞으로 나와! 이 새끼 여기가 네가 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안 오는 동네 가게야? 엎드려 벋쳐!'
그리고는 허벅지가 찢어져 피멍이 들도록 일명 빠따 타작이 시작되었다. 그 정도면 다행이다.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반항 끼를 보이면 무차별 발길질과 따귀 세례를 받아야 했다. 이렇게 얻어터지고도 다시 가출을 안 하는 것이 용할 정도로 폭력은 일상적이었다. 그래야 십 대의 아이들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무지막지한 야만의 시대를 살았다.
그런 야만의 교실에서 일주일이나 무단가출을 하고도 한 대도 맞지 않았으니 껄렁한 반 친구들은 궁금하기 짝이 없었나 보다. 쉬는 시간에 그 비결을 물어보러 오는 놈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개똥철학'을 외쳤던 선생님도 다른 가출자와 나를 다르게 대했던 걸 보니 나의 고뇌를 존중해 주었나 보다. 그렇지만 나처럼 용기 내어 찾아가 얘기하지는 못했을 지라도 나름의 인생의 방황을 했을 다른 친구들에게 몽둥이와 발길질이 아닌 그 이유를 물어봐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여전히 깊은 아쉬움이 남는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첫째가 대여섯 살 무렵까지는 약간의 체벌은 훈육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고 믿었다. 내가 부모님과 선생님들로부터 그렇게 체득했듯이 말이다. 그런데 큰 아이를 훈육한다고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몇 대씩 때리면서 그 아이의 눈을 읽게 됐다. 초점을 잃고 그냥 빨리 이 시간만 지나가기를 바라는 조그만 아이의 눈 속에서 중고교 시절의 교실의 폭력이 겹쳐졌다. 내 딸의 눈을 보며 어떠한 폭력도 사람을 진심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난 훈육을 위한 체벌 - 그러나 실상은 폭력 - 을 멈췄다. 통렬히 후회하고 반성했다. 때려서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말로도 충분히 변화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