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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년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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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 Sep 29. 2021

바퀴벌레 트라우마

그 아파트 303호 일화

몹시 바빴던 연휴를 지나고 글을 쓰려는데 하필 왜 그 기억이 났는지 모를 일이다.

임시 저장된 토막난 글을 고르려다가 그래도 생각이 밀려오는 이 얘기부터 해야겠다.


죽어버린 장수풍뎅이가 남기고 간 알이 부화하면서 눈에 보이는 애벌레만 6마리를 세고나서

우리 집에 벌레가 생기다니......로 부터 비롯된 기억일게다.


어릴 때 그 아파트는 바퀴와 사람이 더불어 사는 아파트였다.

오래되고 낡았으며 지하실에 방직 공작이 세를 들어있다가 나가고는 

장마에 침수되었다가 방치되어 습하기까지 했으니 

바퀴들에게는 파라다이스가 아마 그곳이 아니었을까.


우리 집은 붙임새가 조악하기 짝이 없어 틈새가 곳곳에 매우 많이 있는 장롱을 썼기에

그 또한 그들의 서식에 지대한 공을 했을거다.

시시때때로 갑툭튀하는 바퀴들에 처음에는 비명을 질러대며 살았지만

초등학교 5학년즘 되던 시기에 나는 무심히 맨 손으로  때려잡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 무심한 경지를 뒤집은 건, 크게 두가지 사건이 있었다.


어쩌다가 아빠의 친구분이 우리집에 방문하시는 날은 대박인 날이다.

종합 선물 세트라고 써 있는 오만가지 과자가 종류별로 들어 있는 과자 박스가 오거나

혹은 맛있는 파인애플, 복숭아 통조림이 오거나!


아빠 친구 언제 오나...만 목을 놓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날은 파인애플 통조림이었다.

맛있게 먹고 남은 파인애플을 나중에 먹어야지, 하고 머리맡에 놓아두고 잠이 들었었다.

자면서 잠버릇으로 뒤척이다가 만세를 하면서 팔을 내리쳤던 거 같은데

손에 느껴지는 톡 터지는 축축한 느낌.


소름이 끼쳐와서 불을 켜보곤 경악을 금치 못했다.

파인애플 틈틈이로 까꿍하고 있는 바퀴 일가족들.

내 손등에 터져 죽은 제일 큰 시신 하나.

뒷 일은 어떻게 수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일이 있고서 나는 그 촉감에 대한 트라우마로 맨손 때려잡기 신공은 더이상 발휘하지 못했다.

대신에 손잡이가 형광에 가까운 초록색이고 넓적한 스파츌러 부분이 촌스런 다홍색에 가까운 파리채를 애용했다.


하루는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발치에 정말 역대급 바퀴가 서성이는 걸 발견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파리채는 너무 멀었다. 내가 일어서서 움직이면 놈은 도망갈 것임이 분명했다.

더듬이를 움직이며 주변 장애물을 검색하는 녀석을 보건데 

이대로 놓쳐서 그냥 보내기엔 숙주임에 분명해보이느 그 덩치를 보낼 수가 없었다.

궁금하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녀석의 알 부화현장을 알기 때문이다.

고심하는 동안 놈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다급한 마음에 나는 결국 손에 들고 있던

하늘색 하드커버의 표지가 예쁜, 선물받아 소중하게 아껴 읽고 있던 나의 책을 있는 힘것 집어 던졌다. 

명중했으나 기쁘지가 않았다.

늘 중고책만 사 읽다가 새 책을 선물받았는데,

그것도 흰 연두빛이 삼삼하게 섞인 예쁜 하늘색 표지인데.


화장실 휴지를 둘둘 말아 닦아내고 

분무기로 물을 뿌리고 다시 닦아내고 

또 닦고 닦고 닦으면서 나는 전에 없던 분노에 타올랐다.

여태까지는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그냥 살았지만

그날 그들은 내게 아주 소중한 책에 해를 입혔다. 치명적인.


새해가 돌아왔고 중1이 된 그 해에 큰집에 다녀오니 새뱃돈이 무려 13만원이었다.

그 전후를 다 털어서 그렇게 많이 받은 적이 없었기에 아마도 그건 나를 돕기 위한 징조였으리라.

곳곳에 붙이면 바퀴가 먹이를 먹고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죽어버린다는 

그 납작하고 시커먼 약을 30개를 사왔다.

고작 20평 남짓했던 집에 30개를 모조리 붙였다. 

이 쌍놈의 바퀴버러지 새끼들을 다 죽여버리겠다는 각오였다.

그 기억이 마지막이다. 아마도 단숨에 없어지지 않았겠지만,

가끔식 텅 비어버려 휴지로 잡으면 바스라져 버리는 빈 알 말고는 딱히 다른 기억은 없는 걸 보니

나름 나의 최선의 박멸이 성공 한 것일까.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바퀴벌레들인데

가끔은 가난으로 가득찼던 그 낡은 집의 따뜻했던 방바닥이 아득하게 그립기도 하다.



#수필 #에세이 #추억 #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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