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란 Jun 21. 2021

봉투

번잡한 하루를 마무리 할 즈음, 유난히 지치는 하루가 있다. 

아이들이 잠들고 사위가 고요해져야 종일 흐트러졌던 마음이 스물스물 제자리를 찾아든다. 

그 마음들 중에 유독 꾸짖어 재운 아이에게 미안해지는 밤이면 

나의 이런 마음을 달래려고 살며시 꺼내보는 봉투가 있다.


겉에는 어느 보험사 로고가 적혀있는 그냥 평범한 종이 봉투.

그 봉투를 열어보면 또 갖가지 봉투가 조로록 나온다.


첫 아이가 더듬더듬 글을 쓰면서부터 

색종이를 접어 테이프를 붙여 만든 비뚤한 봉투에 조그만 편지를 넣어주었다. 

가끔은 편지 대신 그림을 그려 넣어주었고, 

‘엄마’ 라는 단어와 하트 그림, 그리고 ‘사랑해요’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적어주었다.


조금 더 커서는 멋지게 접은 종이접기 딱지를 넣어주기도 했고, 

여전히 그 편지에는 ‘엄마, 사랑해요’가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비뚤게 만들어 접어주던 봉투들은 어느 새 제법 이가 잘 맞아 떨어지는 

그럴싸한 봉투로 변해가는 과정들이 보였다.

(그 작은 봉투들 뒤에는 내가 조그맣게 표시한 날짜들이 있다.)


어릴 적 우리 집은 먹고사는 일이 가장 중요했으므로 아름다운 것에 눈을 뜰 사이가 없었다. 

아름다운 것들은 대부분 돈이 되지 않거나 혹은 쓸데없는 헛돈이 들기 마련이었다. 

아름다운 것들 대신 튼튼하고 질긴 것들을 선택해야했고, 어떤 것이든 실용적이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자란 나는 나의 첫 아이가 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보물들을 

가입한 보험증서가 들어있던 봉투에 무심하게도 모아두었다.

보물의 가치는 알기에 모아는 두었으나, 너무나 평범하고 구김 가득한 종이봉투.


처음으로 그 봉투가 거슬렸다. 

쓸데없는 데에 돈을 쓴다고 타박하는 엄마 목소리가 귓전에 동동대지만 

좀 더 예쁜 봉투로 바꿔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런 작은 사치 하나쯤 쓰윽 써버릴 수 있으려고 경제 활동에 발 벗고 나서고 있지 않은가.


몰랐던 봉투의 세계는 실로 놀라웠다. 

나의 아이의 편지가 들어있는 봉투들을 넣을 커다란 봉투를 찾아 헤맨 끝에 

눈에 폭 들어왔던 것은 단단하고 요철이 느껴지는 합지로 만든 용돈 봉투였는데 

봉하는 부분에 커다란 꽃이 따로 붙어있고, 

가장자리를 살짝 그을린 듯 색을 넣어 그 한가운데에 화려한 푸른색 큐빅으로 붙여둔 것이었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이렇게 고운 봉투를 사서 거기에 용돈이나 편지를 넣어 보내기도 하는구나. 

새삼 무용한 것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봉투를 구입했다. 

(사실은 그 날, 봉투를 사는 데에 쓴 돈은 헛돈도 아니고, 무용하지도 않음을 알게 되었다.)


아이가 준 소중한 것들이 새로 자리 잡은 봉투는 아무도 손이 닿지 않는 내 서가의 맨 윗 부분에 쏙 들어갔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도 않고, 조용히 나 홀로 감상하기에 좋은 서가의 얇은 한 켠. 

시간이 흘러서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작은 편지 봉투를 주지 않게 될 그 시간에 대비한 추억 보험이라고 할까. 

세월이 지나서 저 봉투 겉면이 누래지도록 또 얼마나 많은 작은 봉투들이 모여들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