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과 디테일의 중요성
원하던 진로를 가지려면 대학원에 진학해야 했기에 대학교 4학년 1학기부터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전공하던 심리학과의 특성상 대부분의 학부생들이 전문성을 살리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고, 심지어 타 전공 학생들도 관심을 갖고 많이 지원하기 때문에 경쟁률이 상당하여 학부 입시와 마찬가지로 많은 양의 공부가 필요했다. 선택과 집중을 위해 두 개의 학교만을 목표로 준비했는데, 두 학교 모두 통계학, 정신병리학/심리치료 지식, 영어 번역 능력을 요하는 시험이 제시되었다. 통계, 정신병리학이나 심리치료적 지식은 대학 4년 내내 공부해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지만, 문제는 영어 번역 시험이었다.
심리학 전공 서적에서 발췌된 A4용지 반 페이지에서 한 페이지 분량의 제시문을 시간 내에 번역해야 하는데, 매끄러운 번역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문 용어를 영어로 알지 못한다면 결국 손도 대지 못하고 감점이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나로선 이것이 가장 큰 근심거리였고, 어떻게든 해법을 마련해야 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하루에 한두 페이지의 전공 원서를 번역하고 모르는 단어를 정리한 뒤 따로 암기하고, 스터디를 조직해서 단어 퀴즈를 보고 서로의 번역에 대해 검토해주고 좀 더 좋은 번역 법을 공유하는 식이었다.
번역이라는 작업 자체가 낯설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었지만, 공휴일 상관없이 매일 꾸준히 번역을 하다 보니 점점 속도가 붙고 문장이 매끄러워지며 알고 있는 어휘의 폭도 넓어졌다. 작업이 수월해지니 재미가 붙고 자발적으로 주어진 분량보다 더 많은 양의 자료를 번역하거나 좀 더 어려운 수준의 논문을 찾아 읽어보는 등 공부의 폭도 넓어졌다.
이런 노력 덕분에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첫 번째 대학원 시험날 어느 정도 자신 있는 상태로 시험장에 들어갔으나, 제시된 영어 지문은 생각보다 너무나 복잡하고 난해해 관자놀이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예 짐작도 가지 않는 단어가 2개나 있었다. 망했다... 그러나 여태까지 한 노력이 아까워 최선을 다해 번역을 하고 문장을 반복해서 다듬었고,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단어의 뜻을 추론해 나름대로 적었다.
시험을 마친 후 큰 자괴감에 빠졌다. 나름 정말 열심히 공부했는데 모르는 단어가 있다니 난 안될 사람인가 보다. 하지만 몇십 분 뒤 바로 면접이 있었기 때문에 상념에 빠질 시간은 없었다. 곧바로 준비한 자기소개를 수십 번씩 되뇌고 정리한 자료를 읽었다. 긴장되긴 했지만 면접은 비교적 잘 쳤다고 생각하며 면접장을 나섰지만, 결국 영어 시험을 망쳤다는 생각에 무력감을 느끼고 다음날 있을 다른 학교의 시험에 가봤자 어차피 떨어질 것 같아 아예 가지 않아야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도 했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두 번째 시험을 치러 아침 일찍 일어나 시험장으로 향했다. 이 학교의 시험도 첫번째 크게 다르지 않았고, 대부분 아는 내용의 문제들이 제시돼 수월하게 풀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면접은 자신 있다!
그렇게 삼십여분 뒤 면접장에 들어갔다. 세명의 교수진이 네 명의 지원자에게 돌아가며 질문을 던지는 식이었는데, 하필 내가 제일 첫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의 질문을 들을 새도 없이 대답을 짜내야 했지만, 대부분의 질문에 적절히 대답해 면접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이제 됐다! 거의 합격에 다 와간다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러나 마지막 질문에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됐다.
“지금 이 학교의 임상심리학 교수님이 두 분인데 왜 OOO 교수님께 지원을 했나요?”
머릿속이 멍해졌다. 두 분 교수님 중 OOO 교수님의 평판이 좋고 대학원의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구성되어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지원을 하게 됐지만, 이런 이유는 면접 때 좋은 대답이 되지 못했다. 대학원을 지원한 것인 만큼 교수님의 주요 관심사나 연구들에 대해 살펴보고 이런 자료들을 근거로 해 지원동기를 설명한다면 정말 좋은 대답이 되었을 테지만, 놀랍게도 이 교수님의 논문을 단 한편도 찾아보지 않은 것이다.
망했다.
결국 여태까지의 페이스를 잃고 헛소리만 늘어놓으니, 종일관 미소 짓던 교수님의 입꼬리가 점점 내려가는 모습을 목도했다. 확실한 실패의 예감.
면접이 끝난 후 집 근처 백화점의 지하 푸드코트에서 크로켓을 사 먹었는데, 음식을 먹는 건지 모래를 씹는 건지 입 맛이 썼다. 나는 안될 사람인가. 이번에 되지 않으면 그냥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우울함은 커져만 갔다.
그러나 결과 발표날, 예상처럼 두 번째 시험을 본 학교는 불합격했지만, 천재일우로 첫 번째 학교에 합격하게 됐다. 게다가 꽤 좋은 성적으로 시험을 치렀다고 한다. 두 학교 모두 가고 싶었던 곳이라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주 조금만 더 신경 썼다면 두 번째 학교도 합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벌써 5년 전의 일이지만 이때의 경험은 나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아무리 자신 없는 일이라도 꾸준히 노력한다면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과 내가 어렵다면 남들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 디테일이 부족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자신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깎아가며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모든 수험생 분들도 다들 자괴감이 빠진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을 텐데, 적절한 방향만 잘 설정하고 내가 힘든 만큼 남들도 힘들다는 것을 항상 마음속에 새기며 자신감을 갖고 기나긴 레이스를 끝까지 잘 마무리하실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