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ll Time Crooks, 2003
그가 감독으로서 가진 힘은 이런 작품에서 가장 여실히 드러난다. '바나나 공화국'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쉴 새 없이 웃을 수 있는 영화가 있다. 그렇지만 무언가 의미를 던지는 건 반대로 '원더 휠'같은 영화도 있다. 착잡한 표정으로 엔딩 크레딧이 다 끝날 때까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그가 가진 매력을 모두 표출할 수 있는 영화. '스몰 타임 크룩스'가 그렇다. 네이버 리뷰를 보니 예상과는 다르게 악평이 꽤나 있었지만, 우디 앨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손안에 꼽게 되는 멋진 영화라고 자부한다.
한탕 주의자, 도벽꾼 그리고 자칭 브레인이라고 불리는 레이(우디 앨런)은 초장부터 아주 그럴듯한 계획을 세운다. 도둑질로 감옥에서 2년을 보낸 후 또다시 은행을 털 계획을 세우는데, 은행의 옆 옆 건물인 피자 가게를 사들여 굴을 파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디 앨런의 영화가 아니라면 21세기에 누가 이런 스토리를 잡아가며 영화를 만들겠는가? 정말로 대단한 계획이다. 아무튼, 건물의 임대료가 필요해진 그는 그의 멍청한 동료들과 돈을 모아 건물을 사드리려 하고 그는 아내 프렌치에게 6천 달러의 돈을 빌려달라 요구한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리. 그녀는 손님들 매니큐어 칠해주면서 꼬박꼬박 모은 돈을 레이에게 줄 생각이 없다. 게다가 그녀도 잘 알고 있는 레이의 멍청한 동료들. 그녀 역시 '우디 앨런'의 캐릭터스럽다. 조금 멍청하고 삶이 빡빡하면 어떠한가? 우리는 행복한데. 하지만 그녀의 버티기도 잠시, 레이를 너무 사랑하는 프렌치는 결국 그의 꼬드김 반, 그를 사랑하는 마음 반에 넘어가 임대료를 빌려주기로 한다. 아, 그리고 레이와 동료들의 땅굴을 파는 동안, 그녀는 눈 속 임용으로 가게에서 피자 대신 쿠키를 팔기로 한다.
뭐 어찌 됐든 레이와 동료들은 돈을 모으지만, 아쉽게도 피자 가게는 이미 누군가에게 팔렸다. 소식을 알게 된 레이는 가게의 소유주 '네티 골드버그'부인을 만나러 가지만, 그는 부인이 아니라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베니'.
잘됐다 싶어 레이는 그에게도 동업을 하자고 설득하고, 마침내 레이와 프렌치 그리고 동료 셋까지 환상의 팀이 만들어진다.
어쨌든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가게를 열고, 여러 가지 도구를 사고, 프렌치는 쿠키를 팔고, 굴을 파기 시작한다. 하지만, 상대는 우디 앨런이다. 모든 사람이 예상하듯이 제대로 진행되는 건 하나도 없다. 처음으로 뚫기 시작한 벽에선 물이 쏟아지고, 지도를 거꾸로 읽어 정반대로 굴을 파고, 헤드 라이드를 거꾸로 쓰고 작업을 한다. 보는 이들에겐 환장과 웃음의 연속인데도, 이들은 낙담은커녕 은행에서 훔칠 돈으로 무엇을 할지 머리 굴리기에 희희낙락이다. 역시 모를 때, 없을 때가 제일 행복인가 보다. 그래도 이런 대환장속에 잘 되는 게 하나 있다면 프렌치가 만드는 쿠키가 기가 막히게 팔린다는 거다.
땅굴 파는 건 엉망으로 흘러가지만 프렌치의 쿠키는 불티가 나도록 팔린다. 경찰도 앞장서 쿠키에 대해 칭찬일색이고 가게는 결국 방송에도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일을 도와주려던 프렌치의 사촌 '메이'는 입방정을 떨어 경찰에게 지하에서 남자들이 땅굴을 파고 있다는 이야기를 흘리게 되고 땅굴 작전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마침내 땅굴을 파고 세상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반대편 옷 가게에 도달한 레이 팀은 결국 경찰에게 뒷덜미를 잡히게 되지만, 경찰은 그들을 체포하는 게 아니라 쿠키 프랜차이즈를 제안한다.
그래서 일 년 만에 쿠키 사업은 그렇게 대박을 친다. 미국 전역은 물론 캐나다까지 발을 넓히고 레이 부부와 그 동료들은 멋진 고위직 하나씩을 꿰찬다. 뭐 다들 하는 짓은 땅굴 팔 때랑 비슷하지만 말이다. 돈 걱정 없이 떵떵거리면 행복해도 모자를 일이지만, 프렌치는 다른 고민이 생긴다. 돈이 생기니 자연스럽게 사교계가 눈에 밟히게 되고 그녀 역시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어 하지만 그들은 프렌치를 무시하다며 영 피하는 눈치고, 그녀는 자신의 무식함에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낀다. 이런 와중에도 레이는 별 생각이 없다. 그냥 침대에서 TV 보면서 피자 먹으면 그게 그에게는 큰 행복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프렌치는 파티에서 만난 예술품 딜러 '데이빗'에게
교양 수업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프렌치의 노력은 눈물겹다. 데이빗과 뮤지컬을 감상하고, 박물관엘 가며, 품격 있는 단어 선택을 위해 사전을 외운다. 그렇게 노력하는 그녀의 눈에는 자연스럽게 데이빗이 들어올 수밖에 없고 교양 수업은 어느샌가 둘만의 데이트가 된다. 레이는 진작에 이 수업에 나가떨어진 지 오래라 눈치 볼 사람도 없으니, 프렌치에겐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프렌치가 레이 대신 데이빗과 사랑을 약속하는 것도 우디 앨런이 좋아하는 결말이지만, 안타깝게도 데이빗에게 프렌치는 그저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발판이지 그 이상의 감정은 없다. 이런 와중에 이미 프렌치에게 마음이 멀어지고 있던 레이는 그가 그토록 무시하던 메이에게 감정을 갖게 된다.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 예를 들어 배우자의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사랑한다고 하는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므로 그리 놀랍지 않다. 게다가 쌍방으로들 이러니 얼마나 합리적인가. 누구 한 명 바람피운다고 싸울 일도 없고.
레이는 이미 프렌치와 데이빗의 관계를 예상하고 있고, 그 역시 프렌치에 대해 사랑이 남아있지 않다. 결국 프렌치가 데이빗과 단둘이 여행을 가겠다는 말에 레이는 결별을 선언하고, 무슨 자존심이 그리 남아서인지 재산 반을 합의금으로 아무 조건 없이 뚝 떼어주겠다는 프렌치의 제안도 묵살한다. 그가 선택한 것은 합의금이 아니라 다름 아닌 도둑질.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사교계에서 만나게 된 인사의 보물을 털어 거하게 한몫 챙긴 후 메이와의 달콤한 노후를 꿈꾼다. 하지만 그는 땅굴팀의 브레인이다. 무사히 훔친다면 그게 이상한 거지.
프렌치 역시 마찬가지로 상황이 좋지 않다. 쿠키 만드는 것밖에 몰랐던 프렌치가 데이빗에게 푹 빠져있는 동안 프렌치는 그녀의 회사 재정 관리자에게 사기를 당한다. 회사뿐만 아니라 집, 예술품 모두 저당 잡히게 되고 사교계에 꽃을 꿈꾸던 그녀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를 지갑으로 생각하던 데이빗은 그녀가 파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떠난다. 우디 앨런 필모그래피에 등장하는 남자의 반 이상은 전부 치졸하지만 데이빗은 치졸의 끝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아무래도 우디 앨런이 휴 그랜트에게 열등감을 좀 느꼈나 보다. 치졸한 연기도 휴 그랜트가 하니 멋있어 보이긴 하더라.
둘 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알거지 신세가 돼버리니, 그제야 이성 회로가 조금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결국 서로가 얼마나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였는지 뉘우치며, 흡사 전래동화와 같은 결말을 지으며 영화를 맺는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그 의도는 분명 하나, 조금 아리송하다. '마이티 아프로디테'와 같은 맥락이라고 치기엔 스토리가 조금 어설픈 감이 있지만, 어쩌겠는가. 상대는 우디 앨런인걸.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나같이 우디 앨런이 무슨 짓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충분히 그를 엿볼 수 있고 매력적이겠지만 아닌 이들에게는 충분히 따끔한 비평을 들을 수 있는 영화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나에게 있어서 그의 영화는 텅 빈 다섯 개의 별을 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