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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Jan 05. 2020

오늘 같은 어제 4

네 번째 일기장

희망적인 내용으로 세 번째 일기장은 끝났다. 여행을 간다는 것은 희망적이다. 약 한 달간 다녀온 여행기는 일기장이 아닌 얇은 책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당시 여행을 다니면서 썼던 글과 찍었던 사진으로 책을 만들었던 기억이 났다. 저채도의 녹색과 오렌지, 투톤으로 디자인된 그 책은 100권 정도만 제작된 나의 첫 출판물(?)이었다. 그 감정들과 기대를 잠시 접고 몸을 일으킨다. 오늘이 수요일이라는 것이 갑자기 생각났기 때문이다. 싱크대 위의 붙박이 장을 열고 스프레이를 꺼낸다. 뚜껑을 열고 수돗물로 몇 번 헹궈낸 후 물을 가득 담는다. 화분에 물을 주어야 한다. 물은 생명이다. 난 그들에게 생명을 주는 존재인 것이다. 우선 싱크대 옆의 키 작은 냉장고 위에 자리하고 있는 쟈스민에게 물을 준다. 화분이 큰 편이라 스프레이 두통 분량의 생명을 주었다. 약간 마른듯한 이끼 위로 물꽃이 생기며 물은 서서히 아래로 숨어들었다. 30초가량이 지나자 화분은 필요한 만큼의 물을 흡수한 뒤 나머지는 배설해 버렸다. 소화가 상당히 빠른 녀석이다. 배설물이라 그런지 약간은 색이 바래고 깨끗해 보이지도 않았다. 어쨌든 만족한 것 같다. 다시 물을 채워 책상 위의 창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두 개의 조그만 화분에게로 간다. 하나는 난 종류이고 다른 하나는 선인장 종류다. 난은 키우기 어렵다고 들었다. 그런 것 같다. 가장 관리하기가 힘들다. 메말라 보이고 시들어 보이고. 사랑이 부족한가 보다. 반대로 선인장은 굳세다. 미친 사람의 머리카락마냥 뻗친 줄기는 힘이 있어 보인다. 서로 의지하라고 둘을 붙여 놓았다. 선인장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 것 같지만 말이다. 그 둘에게 물을 나누어 준다. 화분이 작아서 조심스럽게 뿌린다. 한 번에 붓지 않고 작은 입자의 물을 뿌린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나의 배려이고 사랑이다. 사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지만. 물주는 일은 끝났다. 일요일까지 그들은 버틸 것이다. 날 기다리며. 흐뭇했다. 두 개의 조그만 화분 왼쪽으로 향을 피우는 사기 접시가 있다. 그 접시 위에는 직접 만든 향을 꽂기 위한 철사 구조물이 있다. 그 주위로는 향을 태우며 죽은 흔적들이 널려있다. 서랍에서 향을 하나 꺼낸다. 언제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오랜만에 인사동으로 외출을 했었다. 그것도 아침에 말이다. 난 그림을 그릴 색 한지를 구입했고 인사동을 빠져나오기 전에 위치한 또 다른 한지 가게에서 향을 샀었다. 인도에서 수입된 향이었는데 향의 향이 10가지가 넘었다. 모두 피워 볼 수 없어서 그냥 향을 맡았다. 그리 다른 걸 모르겠더라. 다 같은 향인데 이름만 다른 것 같았다. 이름을 훑어보다가 아편이라고 쓰인 향을 하나 골랐다. 1000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피우고 있다. 난 가끔 향을 피운다. 여러 가지 목적이 있지만 이렇게 무엇인가 뿌듯한 일을 하고 난 다음에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많이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담배 연기를 비롯해 나쁜 냄새도 잡아먹어 버린다. 강한 놈이다. 그처럼 아름다움이 추악함을 잡아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자에 앉아 향의 움직을 따라 눈을 움직여 본다. 미세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곤 흔적도 없이 흩어져 내 코를 취하게 한다.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눕힌다. 내 몸을 다 붙일 만큼 길지 못해서 다리는 구부린 채 눕는다. 이대로 있고 싶다. 5분 정도 나는 그렇게 있었다. 거의 무의식 속에 있었던 것 같다. 몸도 마음도 편안했다. 몸을 일으켜 다시 향을 바라본다. 이미 반 이상이 재가 되어 있었다. 그의 죽음을 목격하기 싫었다. 시선을 옮긴다. 방은 대체적으로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방바닥 곳곳에서 먼지들과 널브러져 있는 머리카락, 털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언젠가는 수건으로 쓰였을 바싹 마른나무 껍질 같은 빛바랜 노란 걸레를 싱크대로 가져가 물에 적신다. 신기하게도 물을 머금고 부드러워진다. 늘어진다. 물은 또다시 생명이다. 물기를 꽉 짜낸다. 스스로 배설하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걸레를 잘 편 후 두 번 접어 바닥에 댄다. 구부려 앉아 손으로 닦으려면 힘들지만 깨끗하게 닦이고 일어서서 편안하게 발로 걸레질을 하면 제대로 닦이지 않는다. 장단점이 있다. 난 손걸레질을 택했다. 나를 위해 몸을 태우는 향을 애도하며. 침대 옆부터 닦기 시작한다. 침대 옆이라 그런지 털들이 많았다. 책상 쪽으로 향하며 그리고 주방으로 화장실로. 걸레를 두어 번 뒤집어 가며 접어 가며 걸레질을 했다. 예상보다 바닥이 더러웠다. 그만큼 나도 힘들었다. 쉬고 싶었지만 끝까지 걸레질을 마친 후 더러워진 걸레를 다시 빨기까지 했다. 모든 일에는 마무리가 중요하며 그것은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난 요리를 좋아한다. 요리 또한 창작활동 중의 하나다. 거의 모든 주부들은 하루 두 번에서 세 번 창작 활동을 하고 있지만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냥 습관적인 의무적인 행동으로 여기는 것 같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모두가 다른 맛과 향을 만들어 낸다. 시각과 후각, 촉각, 미각, 청각 그것을 넘어선 또 다른 감각을 즐겁게 하는 대단한 창작물이다. 나 혼자 또는 여럿이 그것을 즐기며 즐거워한다. 요리는 행복한 창작인 것이다. 하지만 뒷 처리는 어떤 경우에나 귀찮고 지겹다. 식어버린 음식물 찌꺼기와 게으름이 접시와 식기 위를 배회한다. 마치 하이에나처럼. 사람들은 늘어진다. 많이 먹은 듯한 배를 잡고 생각을 멈추려 한다. 몸은 이미 멈춰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난 과감하다. 그것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싱크대로 가져가 아주 깨끗하게 씻는다. 다음 창작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위해서 말이다. 보이는 것들이라도 정돈이 되어 있어야 한다. 내 몸속 보이지 않는 수많은 곳에서 일어나는 혼란으로도 이미 벅차기 때문이다. 걸레를 잘 털어 창가에 넌다. 해가 약해서 마르는데 시간이 좀 걸릴 듯싶다. 화장실에서 마무리의 마지막 단계로 손을 씻는다. 손바닥이 물에 불어 있었다. 수건에 물기를 닦는다. 냄새가 전보다 심해져 있었다. 다시 손을 닦고 입고 있던 티셔츠에 손을 문지른다. 티셔츠는 거의 말라 있었지만 전에 닦았던 물기의 흔적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침대 옆 창가에 걸터앉아 밖을 바라본다. 내가 살고 있는 건물 정면으로 또 다른 거주용 건물이 있다. 창들이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종종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눈길이 마주치기도 한다. 난 그들의 사생활이 궁금하지도 않으며 침해하기는 더더욱 싫다. 어떤 이는 내가 창밖을 바라볼 때마다 노골적으로 창문을 닫아 버리거나 커튼을 내리며 불편한 감정을 표현한다. 그녀는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굉장히 예쁘고 내가 그녀를 훔쳐보고 있으며 그것을 즐기는 역겨운 변태나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를 착각 속에서 구해주는 것이 나의 의무는 아니기에 난 그럴 때마다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제 역할을 제대로 할지 의문이 들 정도로 어지럽게 널린 전선들이 보였다. 어떤 전선에는 주의라고 쓰인 노란 푯말이 달려있기도 했다. 한 여름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찢는 듯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알아듣기 싫은 소리. 역시 내겐 그냥 소음으로 들렸고 신경을 자극했다. 그들이 7년이나 땅속에 묻혀 있다가 여름 한철을 지내고 죽어버린다는 동정 섞인 글이나 다큐멘터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 기분이 중요했다. 매미 역시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래 다 그런 거지 뭐. 다행스럽게도 애견 가게의 강아지들은 더위에 지쳤는지 더 이상 짖지 않고 있었다. 나도 더 이상 짖지 말고 여행기나 읽어야겠다.


2000.7.16

어렵게 떠나는 여행이다.

거의 억지로 발급받은 단수여권과 약간의 현금, 신용카드

그리고 떠나야겠다는 마음만으로 아무런 준비 없이

그렇게 비행기에 오른 나였지만 마음은 너무나 가벼워져 있었다.

이륙하는 육중한 기체 속에서 앞으로 내게 다가올 무언가를 기다리며,

아니 적극적으로 얘기하자면 찾아 나설 그 무엇을 생각하며

조그맣게 뚫린 창문 밖을 바라본다. 창문이 열리지는 않았다. 

약간의 긴장과 함께 부풀어 오른 나의 마음, 빨라진 심장소리에 내가 놀란다.

나쁘지 않은 놀람이다.


2000.7.17

밖이 요란하다. 비라도 내리치는 소리 같았지만

로마의 첫 아침은 따사로운 햇살로 반겨 주었다.

테르미니역 부근에서 참치 샌드위치와 마실 것을 산다.

가방에 쑤셔 넣은 채 담배가게에서 하루 동안 이용할 수 있는 교통 티켓을 구입한다.

메트로를 타고 한 정거장을 갔다.

1시간가량을 지도도 보지 않은 채 걷는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 그런 막연한 생각들이 날 사로잡았기에.


2000.7.18

로마의 찬란한 햇살. 습하지 않아 그늘을 찾을 필요가 없다.

검게 그을린 얼굴이 거울에 비친다. 이 기분을 누가 알까?

판테온을 거쳐 콜로세움까지 걷는다. 사람이 많아 들어가지는 않았다.

뒷 편의 한적한 언덕길에서 선물을 받는다.

인도를 따라 늘어선 아카시아 나무에서 날리는 향과 수많은 잎들을 맞게 된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며 사진도 찍어 본다.


2000.7.20

두오모 광장에 앉아 여유를 부려본다. 한가한 평화로움을 잠시 즐겨본다.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즐거운 표정들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거의 모든 관광객들이 그렇듯 사진이 앞선다는 것이다.

흐린 날씨가 싫지 않다. 비둘기 떼들과 그들이 싸질러 놓은 오물 그리고 광장.

성당, 관광객과 일상처럼 이곳을 스치는 사람들.

비둘기 먹이를 파는 사람들에겐 비둘기를 부르는 소리가 있다.

자유를 평화를 순수를 부르는 소리, 혹은 유인하는 소리.

하지만 왜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지? 모르겠다. 유해조수 아닌가?

두오모 성당 안으로 들어선다. 거대한 공기의 울림과 유동이 느껴진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무엇을 찾아왔는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이렇게 경건하고 고요한 공간 속에서 말이다.


2000.7.21

단테거리를 지나 까스텔로 스포제스코에 도착한다.

지금까지 보아온 다른 건축물과는 분명히 구분이 가는 건축물이다.

미켈란젤로의 삐에따가 거기에 있었다. 수많은 다른 작품들과 유물들.

셈삐온 공원에 들어서 벤치 하나를 차지하고 누웠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 비추는 햇살이 눈을 찌푸리게 한다.

몸이 아픈 걸까? 움직이지 않는다. 힘이 없다. 더 자야 했던 것일까?

배가 고프지도 않고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없다.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나의 활기를 빼앗아 갔는지 모르겠다. 멍하니 앉아있다.

내일은 다른 곳으로 떠나야겠다. 파리로 갈까? 부르는.

날 부르는 곳으로 가야겠다. 


2000.7.23

1시 반이 돼서야 빛을 본다. 커피와 말보로, 켄트의 음악 그리고 구름.

텅 빈 머리. 이것이 휴식이었다. 요일을 잊고 살았다. 오늘은 일요일이란다.

스파게티를 먹고 음악을 들으며 편안하게 몸을 기대어 앉아있다. 


2000.7.28

근처에 로댕갤러리가 있었지만 몽마르뜨 언덕이 날 부르는 것 같았다.

걷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기에 강을 건너 메트로를 탄다.

몽마르뜨 묘지까지 가는 길에는 수많은 섹스샵이 있었다.

죽은 사람의 안식처와 섹스샵.

호객꾼 들을 헤치고 묘지로 들어선다.

하나의 도시 같다. 조그마한 집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조용하고 외롭게 자리하고 있다.

수많은 이들의 영혼은 여기에. 까마귀는 울어댄다.

키 큰 나무 사이로 비추는 햇살이 영혼들을 달래는 듯 하지만 까마귀는 계속.

미로 속을 돌아다니며 고요라는 말의 의미를 느낀다.

어떤 이의 무덤에는 젊은 시절의 사진이 놓여있다.

죽어서도 젊음을 간직하고 싶은지 젊어서 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신비로운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영원히 잠들어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영혼은 존재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어디에 머무는지 난 알 수 없다. 아직 내 육체는 살아 숨 쉬고 있기에.

아니 지금 내가 영혼인 상태이지만 인식을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건물 사이로 에펠타워가 보인다.

밤에 야경을 즐기려 했지만 바로 앞에 두고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셰이로 궁을 지나 에펠타워에 다다른다.

많은 사람들,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 티켓을 사는 사람들.

그 긴 줄이 짜증스러워 난 올라가지 않기로 한다.

단지 여러 각도에서 탑을 바라보고 사람 구경도 한다.

사진 찍는 아저씨, 아이스크림을 든 아이, 음료수를 마시는 할머니,

웃음이 가득한 그 사람들.


2000.7.30

몸이 너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역에서 짐을 끌어안고 하루 종일 기차를 기다린다. 조금씩 움직여도 보고 사람 구경도 하고. 담배가 떨어졌다. 가게에는 담배를 사려는 사람들로 만들어진 긴 줄이 있었다.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나도 그 긴 줄을 만드는 한 사람이 되었다. 담배를 구입한 후 화장실에 들른다. 모든 걸 해결하고 몸에 무리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그리곤 다시 적당한 자리에 짐을 내리고 주저앉는다. 해는 사라져 가고 한 명의 남자아이가 맥도널드 봉투를 들고 내 옆에 주저앉는다. 담배를 한대 물고 별 의미 없이 그 친구를 쳐다보자 그는 내게 콜라를 마시겠냐는 시늉을 한다. 난 괜찮다고 말하고 피우던 담배를 마저 피운다. 열심히 햄버거를 먹는 그 친구와 몇 번의 눈길이 오갔지만 선뜻 말을 트기란 쉽지 않았다. 드디어 인사를 건넨다. 나의 질문에 그는 손을 내저어 보인다. 영어를 못하는 아이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그는 벙어리였다. 새로운 친구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거의 영어를 몰랐으므로 손짓과 몸짓으로 또는 그림, 영어-스페인 사전을 찾아가며 서로의 의사를 나타냈다. 거의 느낌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정말 착하고 순수해 보였다. 마드리드에서 홀로 여행을 떠나온 벙어리 소년. 나와 동갑내기로 팬터마임을 한단다. 지도와 가이드 북을 펼쳐놓고 우리의 대화가(?) 이어진다. 여행 계획과 여행의 느낌. 우린 이렇게 대화를 했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 내가 너무 많은 말들을 하며 살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2000.7.31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렘브란트와 고흐. 그들 중 난 렘브란트를 먼저 접하게 되었다. 국립 미술관에서는 렘브란트를 무기로 25G(길더)나 받아내고 있었다. 난 그토록 사람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night light’을 보기 위해 미술관으로 들어선다.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섬세하고 어둑한 느낌과 빛의 묘한 발광이 있었다. 빛의 화가라는 말이 어느 정도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림 뒤로 렘브란트는 몰락했다고 한다. 그토록 혼신의 힘을 기울여 작업했던 것일까? 사실 난 렘브란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 그저 사전 지식 없이 그렇게 그를 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강렬했다. 그의 눈으로 보여지는 빛은 그토록 극단적이었을까? 고흐의 광기에 가까운 강렬함과는 다른 그 무엇이 묘한 느낌으로 이끈다.


2000.8.1

공원을 지나 반 고흐 미술관으로 향한다. 아침에 빌린 자전거를 미술관 근처의 공원에 세우고 티켓을 구입하기 위해 줄을 선다. 드디어 나는 어린 시절 알 수 없는 기분으로 바라보던 작은 방 벽에 걸린 고흐의 그림(밤의 카페)을 실제로 보게 되는 것이다. 난 우선 그 그림을 찾았다. 검푸른, 미치도록 검푸른 하늘 아래 노란 불빛의 노천카페가 아름다운 그 그림을. 하지만 아쉽게도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 어디에 있는 것일까?


2000.8.2

늦게 눈이 떠진다. 약간은 무거운 발걸음을 서둘러 중앙역으로 옮긴다.

프라하행 밤기차를 예약하고 짐을 락커에 구겨 넣은 채 암스테르담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기 시작한다. 트램을 타고 하이네켄 공장으로 향한다. 떠나기 전 비싸서 별로 마시지 못했던 맥주를 단돈 1000원에 맘껏 마실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투어시간이 지난 후라 입장을 할 수 없었다. 중앙역 방향으로 걸으며 길거리에 늘어선 상점과 갤러리를 둘러본다. 어느새 난 렘브란트 광장에 서있었다. 거리에선 한 명의 행위예술가(?)가 길거리를 꽉메운 관광객들의 눈과 귀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새는 햇살에 눈을 찌푸리고 담배를 피운다. 그 햇살이 싫지 않았다. 근처 벼룩시장에서 밀짚으로 엮은 가방을 하나 산다. 렘브란트의 집이 근처에 있어 둘러볼 생각으로 들어서지만 그곳 역시 투어시간이 지났다고 한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지각을 되풀이하고 있다.


2000.8.3

근처의 바에서 맥주 한잔 할 생각으로 길을 나선다. 카를교에서 무언가를 팔다가 들어가는 여자아이 두 명에게 바를 추천해 달라고 한다. 그중 한 아이가 친절하게 영어로 가르쳐 준다. 내가 찾아간 곳이 그가 설명해준 곳인지는 확신할 순 없지만 재즈 라이브가 있는 지하의 조그만 공간은 내 맘에 들었다. 1시간 정도의 연주가 끝나고 지금은 쉬는 시간이다. 혼자임을 느낀다. 맨 앞에 앉은 돋보기를 낀 복고풍의 아저씨가 재미있다. 자기가 연주하느냐 혹은 자기가 그들의 스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미소를 짓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드럼 치는 녀석의 과장된 표정과 제스처도 재미있고, 모두가 재미있다. 그들은 음악을 제대로 즐기는 것 같았다. 서로를 주시하며 혹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자신의 손끝에, 입 끝에 감정을 담아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냈다. 기타를 치는 녀석의 웃음은 멋졌다. 여유가 묻은 웃음. 연주가 계속되고 내 잔은 비었다. 지금 프라하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촉촉하게 비가.


2000.8.4

카를교를 건너편 바츨라프 광장으로 걷는다. 프라하에서 나 홀로 맞는 생일이 낯설지 않게 애를 써보지만 사실 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많이도 걸었다. 하지만 모든 게 내 눈을 만족시키고 있었기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1주일짜리 쿄통 티켓을 개시한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트램을 잡아탄다. 종착역을 돌아 다시 레일 위를 미끄러지는 트램 안에서 난 그렇게 내 생일을 맞이하고 있었다. 숙소에 들러서 가방을 정리하고 프라하성으로 향하는 언덕을 오른다. 알 수 없는 화가들의 갤러리와 상점들이 언덕을 따라 프라하성까지 펼쳐진다. 낯선 사람들과의 눈인사. 서로 눈을 바라보며 웃음을 짓고 인사를 나눈다는 것은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난 마음의 여유를 느끼고 있는 것일까? 허기가 진다. 레스토랑에 들어선다. 천장에 달린 팬은 계속 같은 자리를 돌고 사람들은 바뀌고 시간은 흐른다. 사실 난 혼자 지내는 방법을 잘 모른다. 언제나 그러고 싶어 했고 그래 왔지만. 아무도 나에 대해 모르고 나 역시 그들을 모르는 낯선 이곳에서 난 아마도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다.


2000.8.5

토요일. 오늘이 토요일이란 것을 어제가 금요일이란 사실로 알 수 있었다. 로마에서의 첫날이 지난지도 20일째로 접어드들고, 모든 것이 아련하게 기억 속에 쌓이고 있다. 하늘은 비를 머금고 찌푸린 채 오후 3시의 풍경을 덮고 있다. 무엇을 찾아 떠나는 것일까, 아니면 무엇을 잠시 잊으려 떠나는 것일까? 옷을 갈아입고 느지막이 길을 나선다. 카를교를 건너편 구시청 광장을 맴돈다. 거리에선 스웨덴 연주단이 국기를 내걸고 한 판 벌이고, 수많은 관광객들은 주변을 동그랗게 메우고. 갤러리를 찾아다니며 그림을 보고 그렇게 늘 그렇듯 걷고 보고.

프라하에 온 지 3일째. 날씨가 매일 비슷하다. 햇빛이 잠시 비추는 듯하더니 구름이 몰려와 비를 조금씩 뿌리다 멈추고. 하여간 좋다.


2000.8.6

와인을 딴다. 테라스에 걸터앉아 연어 맛이 나는 크림치즈와 담배를 안주삼아 그리고 갑자기 떠버린 햇살을 맞으며, 와인을 한 모금씩 입에 가져가 본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끝났다. 다 마셔버렸다. 그냥 그런 와인이었다. 다행히도 스위트하진 않았지만 맛이 깊지 못했다. 하여간 그 후 난 멍해진 채로 침대에 누워 높은,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바라본다. 해는 저물고 있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좋다. 방은 조금 어둡다. 아니면 내 눈이 어두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2000.8.7

창 밖으로 다시 뜨려 하는 해를 보고 나선다. 그리곤 사람들이 없는 언덕길로 프라하성에 오른다. 프라하성 옆으로 펼쳐진 과수원이 한가하다. 그냥 그렇게 놓아둔 나무들은 잘 자라고 있었고 외롭게 보이는 작은 집 한 채가 주인 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구름이 잔뜩 드리워진 하늘. 조금씩 땀이 흐르고 공원 벤치에 자리를 잡고 엽서 2장을 써내려 간다. 이런 글을 썼다. 사실 난 처음부터 자유롭지 못했다고. 그런 척을 했을 뿐이라고. 갑자기 왜 그런 글을 쓰게 된 것인지. 그 순간 떠오른 생각일지, 아니면 항상 느끼다가 그 순간 인정을 해버린 것인지. 그런 단상들이 떠오르자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추스른다. 오른편으로 보이는 그다지 크지 않은 다리 위로는 자동차들과 트램 그리고 사람들이 교차한다. 갑자기 내가 멀리도 왔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먼 길을 떠나 이곳까지 왔다. 돌아가는 날. 서울행 비행기를 타는 날. 벌써 그 날이 생각나는 것은 내가 지쳐서 일까? 아니면 두려워서 일까? 다시 시작하는 나의 일상들이. 가만히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이 여러 형상을 띠고 있다. 계속 바라본다.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그 커다란 것이 조금씩이나마 움직이고 있다. 어느새 색도 바래서 슬픈 노을빛을 띤다. 그리곤 끊임없이 어디론가 흐른다. 아직 둥글지 못한 달도 어색하게 어두워져 가는 하늘에 모습을 나타낸다. 내가 바라보던 구름이 저만치 흘러가 버렸다. 잠시 딴생각을 했을 뿐인데. 그 어느 것도 기다려주지   는다.


2000.8.10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생수 한 병을 산다. 눈이 감긴다. 침대로 빨려 들어가 무의식 상태로 얼마간. 9시가 거의 다 되어 눈을 뜬다. 강변을 따라 30분 정도 걸었다. 작센하우젠으로 가서 아펠바인을 맛본다. 내가 기대가 컸는지 맛은 그냥 그렇고 지금 이렇게 앉아 흐르는 음악과 사람들을 즐긴다. 검푸른 하늘, 아니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하늘, 뭐라 해야 할까? 20년 넘게 수많은 하늘을 봐왔지만 그때마다 그것을 어떻게 나타내야 할지 모른다. 그래, 그냥 하늘이다. 하늘.


2000.8.13

언덕에 위치한 샤갈 뮤지엄은 호텔과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텁텁한(?) 하지만 시원하고 결코 기분 나쁘지 않은 바닷바람이 언덕을 맴돌고 있어 나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모던하게 생긴 회색 건물과 그것을 둘러싼 정원이 멋지다. 티켓을 끊고 들어선다. 그의 스케치들이 먼저 내 눈에 들어오고 점점 그의 대작들이 펼쳐진다. 건물의 왼쪽 끝 편에 위치한 홀에는 샤갈의 스테인드 글라스, 관람석과 무대, 그리고 한대의 피아노가 쓸쓸히 자리하고 있다. 창 하나하나가 뒤로 비추는 햇살을 한번 걸러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마치 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관문 같다고나 할까? 그 묘한 빛 속으로 내 눈은 빨려 든다. 꿈속의 바다에서나 느낄 수 있을법한 푸른색과 태양 같은 붉은색의 대비가 강렬하다. 난 그곳에 앉아 있었다. 얼마 동안인지 난 그곳의 약간은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빛의 향기를 느끼고 있었다.


2000.8.14

해변을 향해 걷는다. 중간에 패스트푸드점에서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고 해변이 바로 앞으로 있는 도로 위의 벤치에 앉는다. 넓게 펼쳐진 자갈밭과 바다를 바라보며 햇살 아래 몸을 맡긴다. 햇살이 이토록 따스하고 강렬하며 기분 좋은 줄 몰랐던 것 같다. 들리는 파도소리와 해수욕을 즐기는 수많은 인파. 둥그렇게 형성된 해변이 3km가 넘게 이어진다. 이 곳에서는 아무런 걱정이나 고민도 필요 없을 듯했다. 아니, 존재할 수 없는 듯했다. 해변을 따라 걷다가 바다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뜨거운 자갈 위에 누워버린다. 몸을 뒤집기도 하며 한가롭게. 1시간쯤 누워 있었을까?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바닷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오랜만이다. 아니, 니스의 바다는 처음이다. 몸이 거의 잠기자 헤엄도 쳐본다. 비록 수영복을 준비하지 못해 입고 있던 사각팬티를 입은 채였지만. 내 몸을 감싸고 있는 바다와 이리저리 움직여주는 파도. 발바닥에 걸리는 고운 돌들. 몸이 식어가고 다시 꺼내 달궈진 돌에 눕힌다. 말린다. 잘 말려서 어디론가 가야겠다.


오스트레일리아 산 샤도네이. 냉동실에 넣어 둔 후 시간이 흘러 차가워졌을 때쯤 오른손으로 가볍게 쥐고 바닷가로 향한다. 바다에 드리워진 달빛과 하늘에 둥그렇게 박힌 달이 현실 감 없이 다가온다. 자갈을 깔고 앉아 바람을 맞으며, 파도가 만들어 내는 소리를 들으며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2000.8.16

돌아가는 날이라 그런지 잠을 설친다. 기차를 갈아타고 출발을 기다리며 그동안의 일들을 떠올린다. 1달이 지나버렸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지막 날을 거의 기차에서 보내게 되었다. 오늘 기차는 꽉 찼다. 나처럼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론가 떠나는 것인지, 일상으로부터. 제노바를 거쳐 기차는 계속 달리고 난 뒤로 사라지는 풍경을 아쉬워하며 다음 여행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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