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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Dec 30. 2019

오늘 같은 어제 3

세 번째 일기장

끝이라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시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시작이 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끝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지. 그 사이의 수많은 과정들은 왜 그리도 지루할 때가 많은지. 물이나 한잔 마신다. 한 번에 들이켠다. 티셔츠에 약간 흘리긴 했지만 상관없다. 시원하게 마시고 갈증을 해소했으면 그것으로 된 거다. 단 하나의 티 없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는 쉽지 않다. 기계적이며 차갑다. 재수 없고 역겹다. 물론 그렇지 않게 완벽한 사람도 어딘가에 살고 있겠지만 난 아직 본 적이 없다. 다른 노트를 펼쳐 든다.


1999.9.6

꿈을 꿨다.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채 말없이 웃고 있었다.

바로 내 앞에서. 황홀했다. 하지만 지금은 현실이다.

돌아가고 싶다. 그곳으로. 어렵다. 그립다.


1999.9.24

조용하게 그리고 슬프게 땅을 적시는 비.

땅으로 추락하여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내는 비는 새벽에 나를 대한다.

깊은 밤. 나는 그 무엇을 생각하며 펜을 들었다.

반 지하의 방에서는 끝없이 환풍기가 돌아간다.

하지만 빗소리를 방해한다. 적어도 이 순간에는.

꺼야겠다. 그리고 빗소리를 들으며 그곳으로 돌아가련다.

슬퍼 잠이 올지 모르겠다.


1999.9.29

907번 버스 안이다. 굉음을 내며 버스는 노선을 질주한다.

아침부터 비가 와서 나는 생각했다. 버스 창가에 앉아 비를 즐기겠노라고.

하지만 지금은 비대신 군데군데 약간의 명암을 가진 먹구름과

그 사이로 보이는 한없이 푸른 바다가 펼쳐져있다. 


1999.10.2

짧은 가을이 느껴진다. 창밖의 풍경은 내게 벅찰 정도로 눈부시다.

창문 또한 너무 크다. 가을에 묻혀 눈을 감고 싶다.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역시 내겐 벅찬 풍경인가 보다.


1999.10.6

스카이라운지에 있다. 나는 높은 곳이 좋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마시는 맥주는 너무 어렵다.

더 높은 빌딩들이 시야를 방해한다. 더 위로 가고 싶은데.

높은 곳의 위치가 매력인지 내려다보는 게 매력인지.


1999.10.7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비가 내렸지만 집을 나설 땐 비를 맞을 수 없었다.

회색 하늘이 비를 머금고 있다. 그리로 뛰어들고 싶다.

비가 내려 물이 되는 것이 싫다. 단지 내리는 비 자체가 매력적이다.

눈꺼풀이 아래로 향한다.

주위의 소리는 희미하고 눈 앞의 모든 것이 내게서 달아난다.


1999.10.11

꿈과 현실의 경계는 어디일까?

아니면 우리가 꿈이라 말하는 그 세계는 또 다른 현실은 아닐는지.

4시간 동안의 꿈은 신비롭고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난 혼자가 아니었다. 그 촉감이 아직도 느껴질 정도로 섬세한 꿈.

그 세계가 그리워서인지 눈꺼풀이 다시 무거워진다.


1999.10.13

흐릿한 구름이 걷히고 옅은 가을 하늘이 펼쳐진다.

펼쳐진 구름 사이로 하늘이 보이는 건지 펼쳐진 하늘을 구름이 가리고 있는 건지

어쨌든 자꾸 흐른다. 변한다.


1999.10.14

입안에서는 아직도 알코올 향이 감돈다.

향기로운 위스키 향과 토해낸 음식물 냄새가 섞여있다.

속도 좋지 않다. 먹고 싶진 않지만 무언가로 속을 채워야겠다.


1999.10.17

한가한 일요일 저녁이다.

이젠 가을을 뛰어넘으려는 듯 공기와 비가 차다. 책을 읽고 음악을 흘린다.

무엇을 얻을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얻겠지. 잃을 것이 없으니.

밥 딜런은 끊임없이 노래를 들려준다. 원하면 언제든지. 몇 번이든.


1999.10.18

날씨가 추워진다.

몸이 움츠러들고 새삼 내 몸의 따뜻함을 느낀다.

그리고 서서히 눈이 감긴다. 더 깊이 따뜻함을 느끼기 위해.


1999.10.19

공중에 떠있다. 구름이. 희망과 욕망이. 무엇보다 내가.

도무지 만족과 적응을 모르겠지. 그것이 무얼까?

내가 바라는 막연한 사건과 상황은 한심스럽다. 바보 같다. 이해할 수 없다.


1999.10.20

공복감에 시달린다.

무언가 그 속에서 끓어 목구멍까지 나오려 한다.

맥도널드 광고지에서 웃고 있는 남녀와

그 보다 눈을 끄는 햄버거와 콜라가 날 놀리고 있다.


1999.10.23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차들은 개미떼처럼 끊임없이 열심히 지나간다.

저편 학교에서는 운동회 준비가 한창이다.

교단에 선생이 올라와 목이 터져라 학생들을 지휘하고 다그친다. 

보이지는 않지만 지루해하는 학생들의 표정이 느껴진다. 

엠프를 타고 확장된 그 소리는 이곳까지 들려와 내 귀를 괴롭힌다.

누구를 위한 운동회인가? 병신들. 개새끼들.


1999.10.24

밖은 춥고 안은 따뜻하다.

하지만 난 겉은 춥고 안은 얼어버릴 것 같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손을 가져가 보지만 열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무엇이 나로 하여감 열이 오른다 생각하게 한 것일까.


1999.10.28

슬라이드 프로젝터의 눈에서 한줄기의 빛이 퍼져 스크린을 비춘다.

그 빛이 향하는 공간을 따라 작은 먼지들이 끊임없이 춤을 춘다.

이 먼지 속에서 살고 있었고 난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많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먼지가 아름답다. 하지만 먼지일 뿐.


1999.11.3

가을 오후의 햇살은 강렬하다. 레드와인과 소시지.

창밖으로 나른한 풍경이 펼쳐진다. 햇살의 장난 인지도 모른다.

내 눈을 멀게 하는 저 강렬한 햇살은 위엄이 있다.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정신까지 나른하다. 와인이 반쯤 빈 것 같다. 좋다. 가볍고 무겁다.

머릿속은 담배연기로 탁해져 있어 내리쬐는 햇살과 대조를 이룬다.

멀어져 간다. 저 하늘이.


1999.11.6

머리가 아프다. 주사 바늘을 머리에 꽂아 그것들을 빨아낸다.

뿌연 연기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매연과 섞여 버린다.

잠이 온다. 서서히 눈을 감는다. 잠은 충분히 잤는데. 하지만.


누군가와의 대화 내용이다.

“벌써 목요일이네. 시간 빠르다.” “그러다 죽는 거지.”


1999.11.8

인류의 활동 영역은 점차 줄고 있는 듯하다.

직장 안에. 집안에. 방안에. 보이지 않는 테두리 안에.


뭘 할까? 도대체 무엇을. 왜?


게으름으로 늘어가는 뱃살. 그에 대한 대가는 혹독하다.

쉽게만 쌓여가는 게으름을 만회하기 위한 땀은 아주 많을 것이다.

어쩌면 한 방울의 땀도 볼 수 없을지 모른다.


1999.11.16

침대 위. 추위. 노트와 펜. 오후 9시. 기다림. 들리는 소리.

가려움. 피곤함. 걱정. 소주. 대구찜. 다시 기다림. 그리고 계속 흐르는 시간.


1999.11.17

며칠이 지났을까?

이젠 낙엽도 어디론가 치워지고 새벽의 추위가 낮으로 이어진다.

오늘따라 하늘을 덮은 쓰레기도 보이지 않아 저 멀리 산등성이가 하늘을 가르는 게 선명하다.

바람의 흐름도 잔잔해 오랫동안 하늘을 지켜보고 있어야 듬성듬성 박혀있는 구름의 유동을 느낄 수 있다.

바람이 상쾌하다. 그래 상쾌하다. 시선을 돌려 길거리의 차들을 바라본다.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쓰레기들이 허공으로 그리고 내가 상쾌하다고

느끼는 그 바람 속에 묻힌다. 제길!


1999.11.18

흐린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어디엔가 반드시 존재할 푸르름을 발견하기 위해.

비 오는 날 조차도 사라지지 않는 어디인가의 푸르름.

인생의 푸르름은 어디에 있을까? 머리가 무겁다. 눈이 무겁다.

그리곤 눈을 열기가 두려워진다.


1999.11.19

역겨운 음성. 목구멍을 막아라. 오물로 채우고 나무판자를 대어 못질을 해라.

그리곤 멀리 던져 버리자. 이젠 끝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고통을 없애자.

이젠 쉬자. 지금 이 순간부터.


1999.11.20

해가 사라져 간다. 다가오는 추위와 어둠 그리고 공허가 나를 짓누른다.

맘속의 절규는 자꾸만 깊이 숨는다.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며 날 아프게 한다.

토해내고 싶다. 끊임없이 다짐하고 생각하고 이제 행동한다. 토해버리자.

그런데 뭘 토하지? 잊어버렸다. 그만큼의 시간이 흘러 버린 것이다.

하늘이 푸르렀다. 눈이 시리도록.


1999.11.22

어제 내린 비의 영향인지 오늘은 겨울이라 느끼기에 충분하다.

하늘도 씻겨진 후라 시원하게 푸르다.

새벽까지 마셔댄 그 많은 술은 어디로 갔는지 공복감이 찾아온다.

어디로 갔을까?


1999.12.2

뇌의 크기는 수시로 바뀐다.

지금은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져서 아무런 생각이 없다.

허공의 먼지처럼 편하다. 


1999.12.17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하얗게 때로는 너무나 큰 하얌으로 검게 세상을 덮어줄 눈.

너무나도 눈이 부셔 내 눈을 멀게 하고 난 그것에 파묻혀 버린다.


1999.12.22

자화상. 화가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그린다. 표현한다.

대단하고 대범하며 건방진 행동이다. 위험 부담이 크다.

자신의 껍데기를 까버리다니.


읽던 일기장을 잠시 내려놓는다. 주저앉은 자세도 불편했지만 무엇보다도 배가 아팠다. 먹어서 배부른 것 까지는 좋았는데 속에서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오른손으로 배를 가린 채 상채를 약간 숙이고 화장실로 간다. 엉덩이를 붙이고 나니 정면의 거울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안에는 나의 모습이 있었다. 무표정이었다. 어떻게 이런 표정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의 흔적도 없었다. 아니다 반대 일수도 있다. 많은 감정의 흔적들이 섞여 하나도 알아볼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여러 색의 물감을 섞으면 검은색이 되는 것처럼. 극단적이다. 위험하다. 초점을 흐려 더 이상 나의 모습이 똑바로 보이지 않게 한다. 배설물은 잘 나오고 있었지만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좋은 걸 먹어야 배술 물도 좋은 것이다. 누굴 원망할 일은 아니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찝찝한 마음에 평소보다 휴지를 더 많이 뜯는다. 몸을 일으켜 세면대로 움직인다. 손을 닦고 수건에 물기를 맡긴다. 수건에서 약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 냄새는 내 손에도 묻어났다. 다시 한번 손을 닦고 이번에는 입고 있던 티셔츠에 문지른다. 냄새가 나지 않았다. 가벼워진 배를 안고 책장 앞으로 온다. 읽던 일기장을 집어 든다. 침대에 배를 깔고 엎드린다. 오랫동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더니 그러고 싶어 진 것이다. 몸이 원하는 대로 한다. 왼쪽으로 창밖 세상이 보인다. 태양은 다행히 죽어가고 있었다. 어둠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말이다. 집 앞 애견 가게의 쇼윈도에는 내 손바닥 크기의 강아지들이 아주 조그만 공간에서 놀고 있었다. 내 엉덩이를 겨우 붙일 만한 공간에서. 짖고 있었고 울고 있었다. 불쌍하고 그 주인이 밉기도 했다. 자기들이 저런 공간에서 팔리길 바라며 지내보라지. 개새끼들. 그런 생각들이 들었지만 확실한 건 난 저들이 짖어 대는 소리가 너무나도 싫다. 시끄럽다. 알아들을 수 없는 저 소음들. 난 내가 중요했다. 모두가 다른 사람들의 소리도 들린다. 애견 가게 주인이나 자기 몸보다 무거울 것 같은 병들을 주으러 다니는 노인이나 머리를 멋지게 염색하고 골목을 질주하는 중국집 배달원이나 언제 또다시 이 골목을 지나칠지 모르는 행인들이나, 사실 대부분이 비슷하지만 다르다고 난 생각하고 싶다. 얼마나 슬프까? 그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다 같다면. 건방진 생각이다. 잡생각을 지운다. 일기장으로 시선을 옮겨 읽기 시작한다.


2000.1.4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던 새해가 지났고 며칠이 더 지났다.

무엇을 기대하는지 모른다. 무엇이 바뀐지도 모른다. 단지 숫자 장난인가?


2000.1.8

비가 내리고 난 그 소리를 듣고 몸으로 느낀다.

그저 빗소리가 되고 싶고 그가 되어 내리고도 싶다.

단, 지면에 닿고 싶지는 않다. 그건 싫다. 이기주의자.


2000.1.9

미련이 날 놓아주질 않는다.

내 안의 그것이 말이다.


2000.1.12

2000년 1월 12일 새벽 3시 24분.

언제부턴가 시간을 적는 버릇이 생겼다.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서 인가?

맥주 한 캔으로 날 살찌우며 담배 연기를 뿜는다.

꺼진 꽁초와 함께 담뱃갑으로 손을 가져가지만 빈갑이었다.

아까 내리 피우던 담배가 아쉬웠다.

차가운 새벽 공기로부터 자리를 옮긴다. 따뜻함과 음악이 담배를 대신한다.

조금 남은 맥주가 아쉽지는 않았다. 얼기 직전의 맥주들이 냉장고에 더 있다.

여유. 간사함. 눈을 감은채 태양을 대할 것 같다.


2000.1.15

난 미련이 많다.

이렇게 다짐하기로 했다. 아쉬움을 남기되 후회는 하지 말자고.

아쉬움이 미련으로 바뀔 줄은 몰랐다. 그 미련이 후회로 바뀔까 두렵다.

후회를 하고 있으면서 미련이란 단어로 대치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000.1.19

무심코 펜을 놀려본다.

라디오를 듣고 있지만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온몸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킨다. 시간 감각을 잊어버렸다. 잃어버렸다.


2000.1.20

식어가는 뻘건 오돌뼈. 흩어지는 연기들.

기울어지는 소주잔. 들리는 노래. 희미해질 것 같은 정신.

어두운 조명. 그리고 나.


2000.2.3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너무 힘들다.


2000.2.7

똥을 뿜어냈는대도 뭔가 남아 있는 것 같다. 밑이 찜찜하다.

이렇게 더러운 기분을 느낄 때가 가끔 있다. 뭘 먹었지? 많이도 먹었다.

혀의 욕구 충족을 위한 무절제. 내장도 게으름을 피운다. 항문조차도.


2000.2.8

창가의 내 좌석은 유난히도 바람이 많이 새는 듯하다.

울산행 버스에 오른 지 3시간이 조금 넘었고 난 그 시간을

신문 읽기. 생각하기. 수면등으로 나누었다.

창밖의 어둠 속에서는 차들의 라이트가 꼬리를 물며 뻘건 빛을 발한다.

깨끗하고 차가운 밖. 그렇게 느껴지는 밖.

지금 달리고 있는 곳이 어딘지 모르겠다. 단지 목적지만 알고 있다.

앞좌석들을 훑어본다. 검은 형태의 뒤통수들이 널려있고 가끔씩

그들을 비추는 작은 조명이 켜있다. 매우 낯설다. 이게 이질감인가?

운전 석위의 디지털시계는 일정한 속도로 숫자를 바꾸고 버스는 계속 달린다.

어딘지 모를 곳을.

내 시선은 이제 어둠을 향하고 가끔씩 반대편에서 질주하는 라이트에 눈을 살며시 찡그려 본다.


2000.2.10

좁고 불편한 공간에서의 단잠. 2시간이 지났다.

버스는 이만큼 와있고 저만큼 가기 위해 잠시 섰다.

불규칙하고 예정되어 있지 않은 하지만 재미없는 시간들로 돌아간다.

그것이 일상인가? 단지 내가 그렇게 부르는 생활인가?


2000.2.15

두려움은 막연한 불안에서 온다.


2000.2.16

지루한 지하철.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대중.

그리고 극소수의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삶을 배우고 느껴본다.


2000.2.20

몸을 뒤척이다 드디어 게으름을 떨쳐버렸다.

하지만 이미 아침은 잃어버렸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다행히도 주저앉지 않은 채 그대로 있어 주었다.

두통과 함께 공복감이 밀려와 날 어디론가 이끈다.

화장실의 거울 앞에 비치는 얼굴에는 어제의 피로가 쓰여있었다.

씻어낸다. 차가운 물로 그것들을 힘껏 닦아본다.


2000.2.22

광화문으로 향한다. 버스가 오래 걸리지만 그래도 지하철보다는 낫다.

지하철을 타는 순간 난 괴로움에 갇혀 버린다.

탁한 공기의 어둠을 뚫고 레일 위를 아주 일정하게 예정대로 달리는 쇳덩이.

무표정의 얼굴들과 그에 묻어나는 피로와 무상들.

머리의 무게를 주체하지 못하고 끄덕거리는

또는 입을 벌린 채 벽에 뒤통수를 박아버린 저들의 꿈이 궁금하다.


2000.2.25

오늘은 아침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무엇을 할까?

일단 밥은 1시간 뒤쯤 먹기로 한다. 오랜만에 찾은 아침에 일어나

처음 한다는 것이 밥 먹는 일이라면 어떻겠는가!

제주의 봄이 화면을 통해 흘러나온다.

아침 프로그램을 본다.

여행을 떠나고 싶다.

현실의 족쇄를 아니, 내가 스스로에게 채우고 있는 그것을 풀어버리고.


2000.3.4

난 주어진 일만 한다. 무심코 돌아보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두려웠다. 더 이상 누군가 내게 주지 않으면.


2000.3.28

3월이 가버리고 있다. 약속 없이 흘러간 시간을 이제야 짚어본다.

그간의 시간들이 어디에 쓰여졌는지, 어떤 조그만 의미로나마 내게 남겨졌는지.

눅눅한 거리의 새벽안개처럼. 당연한 결과와 반복은 지루하기 짝이 없지만

그것에 기대를 거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2000.5.25

더 이상 의욕이 없다. 시간은 멈춰버렸고..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이 다행스러울 뿐이다. 그것이 내 일상 속의 즐거움....? 


2000.6.25

노트를 펼쳐보니 잃어버린 시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노트의 공백과는 대조적으로. 무엇을 해야겠는데 그것을 나 자신한테 물을 때면

허탈한 웃음만 입가에 맴돌 뿐이다. 막연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내 시야에는 비를 머금은 하늘이 비친다. 비슷하다. 비가 언제 뿌려질지 모르겠다.


2000.6.26

남겨짐. 알 수 없는 음악. 듣기 좋지 않은. 맥주 2병. 20000원

울리지 않는 핸드폰. 눅눅한 새우깡. 이유 없는 담배. 망각.


2000.6.28

비가 왔으면 좋겠다. 오후 2시의 따가운 햇살이 싫어서가 아니다.

그냥 비가 왔으면 좋겠다. 잠깐 쉬면서 내려도 좋고.

그 서늘함과 검푸름 그것이 느끼고 싶을 뿐이다.


2000.6.30

6월의 마지막 밤에 난 라면 두 개를 먹는다.

배부름을 접어두고 마지막 한가닥의 면 찌꺼기를 처넣는다.

땀이 흐른다. 6방울 일 것이다. 바닥에 누워 움직이지 못한다.

눈은 붓고 머리는 헝클어져 걸레짝처럼 흩어진다.

내일이 올지 모르겠다. 막연한 불안함이 엄습한다. 내일은 약속이 있는데.

우습다. 내일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약속이 있다니.


2000.7.2

어둠 속에서 글을 쓰다. 꽤 많은 술과 담배. 그리고 6번의 구토. 눈물.

하지만 바라지 않는 눈물. 양치질. 입에서 흐르는 눈물. 혹은 눈에서 흐르는 침.


2000.7.11

비가 흩날린다.

잠자리는 열심히 날갯짓을 한다.

비에 젖은 날개를.

같은 자리를 배회한다.

날개의 물기가 마르려면 아직 멀었다.

아직도 비가 흩날린다.


2000.7.14

떠난다. 설렘. 그냥 비어있다.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48시간 후면 난 로마의 공기를 마시고 있을 것이다. 공회전을 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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