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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Dec 20. 2019

오늘 같은 어제 2

두 번째 일기장

덥다. 오늘은 다른 날에 비해 더운 것 같다. 다른 날 같으면 이렇게 바닥에 등을 붙이고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으면 에어컨이나 선풍기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절실하다. 절실해도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 아주 게으르게 몸을 일으킨다. 화장실로 향하면서 헐렁한 바지를 벗는다. 문 앞에 다가서서는 티셔츠를 벗어 책상 옆의 빨래통으로 던진다. 정확하게 빨래 통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먼 거리는 아니지만 항상 신중하게 빨래를 던지곤 했다. 깨끗하게 들어가는 옷가지는 내게 가벼운 미소를 선물로 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팬티를 벗어 들고 화장실 문을 닫는다. 팬티는 세면대에 걸쳐놓고 샤워기를 튼다. 물살이 세다. 천천히 머리로 물줄기를 가져온다. 차갑다. 난 원래 찬물로 샤워를 하지 못한다. 이사 오면서 가스 설치를 하지 않아 보일러가 돌아가지 않는다. 몇 주째 찬물 샤워라니. 적응이 될 것도 같은데 할 때마다 이리도 차갑다. 머리를 식힌 후 발끝부터 천천히 물줄기를 대한다. 심장에 가까워질수록 내 몸은 움츠러들고 짧은 경련을 일으킨다. 찬물에 몸이 적응했다는 신호다. 이제 좀 낫다. 끈적한 몸이 한 꺼풀 벗은 것 같다. 팬티를 집어 들고 약간의 샴푸를 이용해 거품을 낸다. 그리곤 바닥에서 사정없이 문지른다. 거품에 묻은 때는 하수구로 빨려 들어간다. 난 그것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물줄기를 퍼붓는다. 물에 젖어 무거워진 팬티를 반으로 접어 양끝을 잡고 비튼다. 쫘악 소리와 함께 머금고 있던 물기를 뱉어낸 팬티는 이제 좀 가벼워졌다. 두어 번 소리가 나도록 턴다. 그것을 들고 화장실을 나온다. 샤워를 하고 난 뒤여서인지 느끼지 못하던 작은 바람의 흐름조차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팬티를 창가에 걸어두고 옷장을 연다. 속옷을 꺼내고 티셔츠를 고른다. 티셔츠가 많은 편이라 항상 고민한다. 뭘 입어야 할지 말이다. 끝부분이 어두운 색의 천으로 덧 입혀진 녹색 티셔츠를 고른다.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바지를 가져다 입는다. 불과 10분 사이에 난 다른 옷을 입고 있으며 시원함까지 느끼고 있다. 책장 앞에 주저앉아 잠시 멍하니 있다. 허전한 마음에 듣기 편한 영화음악 모음집을 튼다. 그리곤 두 번째 일기장을 읽기 시작한다.


1998.11.2

정착하고 싶은 걸까? 비도 오네. 울어버리고 싶어. 술퍼 먹고 싶어.

싸늘한 공기 맞으며 허무함과 비참함을 느끼고 싶어.

채워지지 않는 마음 한구석의 배고픔은 뭘까?


1998.11.16

별이 떨어진단다. 수많은 별들이. 우리가 볼 수 없는, 보지 않는.

나도 언젠가는 별처럼 다른 세상으로 돌아가겠지.

그러지 않을 수는 없을 거야.

지금 이 순간순간들과 지난 시간들이 모여 돌아가는 때를 맞는 것이니 난 이 순간에도 떨어지고 있는 거다.

다만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거지.


1998.11.20

가끔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거울을 보면 낯선 얼굴을 마주하고 있고

어떤 일을 하다가도 뭘 하고 있는지, 누구인지 존재조차 모를 때도 있다.


1998.11.21

담배를 피우려 창문을 열었다. 눈이 오고 있었다.

아까도 날렸지만 조금씩 쌓여 있었다. 슬프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어디선가 들리는 연인의 환호성은 나를 따뜻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게 만들었다.

창밖을 다시 내다보지 않게 만들었다. 날 허전하게 만들었다.


1998.12.3

사랑하던 이가 남같이 느껴진다. 남같이 느끼라 한다.


1998.12.10

누군가를 잊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만났다. 바보.


1998.12.15

만났다. 어색했다. 변했다.


1998.12.21

존재의 이유가 없다면 더 이상의 삶은 무의미하다.

이유를 찾고 싶다. 살고 싶다.


1998.12.23

제기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오늘같이 일하기 싫은 날은 어쩌지. 이미 지났지만. 

좋아하는 거? 글쎄. 하고 싶은 거?. 글쎄. 다 싫어.


1999.1.1

첫날이다. 일출을 맞으러 왔다. 믿어지지   는 이 순간. 혼자이기에 더욱 그렇다.

소금기 섞인 바람이 사정없이 내 머리칼을 헝클어 놓고 난 그것을 즐기고 있다.

새해. 새해에는 모든 것이 바뀌고 무언가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기대에 그친다.

텅 빈 내 마음도 그대로. 아픈 몸도 그대로. 방파제 끝에 홀로 서있다.


1999.1.6

지난 2주 정도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술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내게 닥친 괴로움들을 잊으려, 회피하려 했다.

오늘은 아침에 눈을 뜨니 하늘이 어두웠다. 흐르고 비는 내리고.

그것도 아주 슬프게 조금씩 땅을 적시고 있었다.

하늘도 늘 푸르지 않음을 새삼 느낀다.

비가 내린다. 내가 좋아하는 비가.


1999.1.11

순간 머리가 아프다. 차가운 공기에 노출된 몸은 떨고 있다.

춥고 괴롭고 들리는 노래는 그것들을 도운다.

잠이 빨리 나를 불렀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입안에는 텁텁한 담배와 알코올의 후유증이 맴돈다.


1999.1.15

덜컹거리는 버스는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것조차 허락치 않는다.

많은 사람들 속에 묻혀 내 존재를 확인하려 했지만

오히려 난 그곳에서 소외감이란 큰 덩어리를 얻었다.

슬프다. 허탈하다.


1999.1.16

난 병이 많다.

이 역겹고 한심한 세상에서 얻은 병은 고쳐지지 않는 병일 가능성이 크다.


1999.1.23

설악에 있었다.

술도 더 이상 날 풀지 못했다.

슬프다. 괴롭다. 허탈하다. 아쉽다. 아깝다.


19991.24

누군가를 만났다. 어리다. 단순하다.

그렇다 내게 어른은 없다. 오로지 내가 어른이다.

근데 어른이 뭔지 난 모른다. 화장실이나 가야겠다.


1999.1.31

끝없는 욕망과 달리 몸은 왜 죽어만 가는가?


1999.2.8

안개가 허공을 메우고 있다.

뿌연 게 내 마음 같기도 하다. 습한 공기는 내게 신선하고 신비롭다.

사실 난 매일 안갯속에서, 무엇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불확신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물론 불안하다. 내가 뿜어낸 한숨과 담배연기가 저 안개를 이루는 건 아닐지.


1999.2.9

날씨가 미치도록 흐리다. 좋다.

맑은 날씨는 싫다. 이 흐림이 온 세상을 덮었으면 좋겠다.

너무 흐려서 모든 것이 눈물을 통해 보는 세상처럼 그렇게 보였으면.


1999.3.4

120미터짜리 배 안이다.

밖에는 온통 어둠에 휩싸인 바다뿐이고

배 양쪽으로는 지나는 흔적들이 만들어진다.

배가 커서 그런지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이 너무나 커서 내 존재를 알 수 없는 것처럼.


1999.3.7

한라산 윗 오름을 등반하고 있다. 돌들이 쌓여있는 정상.

조금 더 가야 하나. 어디가 끝인지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기에. 하지만 나도 모른다.

작은 얼음 알갱이가 심하게 날리고 얼굴을 내리치며 더 오르라 한다.

춥고 그립지만 난 오른다. 아무것도 없을지 모르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난 정상에 와있다.

상쾌하다. 올라온 것만으로 의미는 충분하다.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조금씩 하산한다. 춥고 힘들다. 하지만 마음은 상쾌하다.

오를 때 한 칸 한 칸의 돌계단 밖에 보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부린다.


1999.3.8

바닷가로 내려온다.

햇살이 따뜻하다. 오전 내내 감춰져 있던 해라 그런지 신비롭고 아름답다.

내 마음에 있는 불덩이도 저것처럼 빛나는 날이 있을 거다.

흥얼거리는 노래가 왜 이리도 다 슬픈 것뿐인지.

어쩔 수 없는 운명인지, 나태함 내지는 자학 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언덕 너머로 해가 사려 지려 한다. 내일 다시 뜨겠지만.

확실한 건 오늘의 해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단 한 번뿐인 것이다.


1999.3.9

두렵다. 이제 이 노트도 다 썼다.

끝이 온 것이다. 다시 바다를 보러 간다.

고기잡이 배들이 불을 밝히며 바다에 박혀있다.

마치 하늘에 박힌 별처럼. 밤이 깊어간다.

저 세상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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