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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Dec 20. 2019

오늘 같은 어제 1

첫 번째 일기장

음악은 더 이상 흐르지 않고 있었다. 자기 전에 타이머를 맞춰놓고 잔 것이다. 예정대로 되는 일이 그나마 하나 있다는 사실이 고맙게까지 느껴졌다. 침대 왼쪽으로 뚫린 커다란 창문은 날이 바뀌었음을 내게 알려준다. 아침은 도망가고 이른 점심을 향하고 있는 시간이었다. 이리저리 어지러운 전선들이 하늘을 가른다. 그중 창문과 가장 가까운 전선에는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넝쿨이 약간은 부담스럽게 감겨 있다. 어제보다 많이 자란 것 같이 보였다. 나는 더 이상 자라지 않는데. 아니 죽어가고 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그 무엇이 없었다. 다시 몸을 뉘 운다. 창밖을 바라본다. 안보다 넓은 밖을 바라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우스운 것은  누군가 창에 기대어 밖을 바라보는 것을 볼 때면 굉장히 답답해 보인다는 것이다. 네모난 구멍에 갇혀 있는 것 같이 보인다고나 할까? 하여간 밖을 바라보는 건 괜히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것도 곧 질려 버렸다. 음악을 틀어야겠다. 그러려면 몸을 일으켜야 하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시디 중에 그나마 신나는 것을 골라본다. 밥 말리.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아무 때나 들어도 좋은 곡들을 소화해 내는 아티스트다. 언젠가 그의 뮤직 비디오를 봤었다. 긴 다리에 오리 엉덩이를 가진 사자 머리의 흑인 아티스트는 눈을 뜨지 못했다. 아니 뜨지 않았다. 감긴 눈과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제길!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 뭘 하든 말이다. 그의 음성은 스피커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갈증을 느낌과 동시에 화장실도 가고 싶어 졌다. 갑자기 바빠졌다. 우선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꺼내 마셨다. 그다음 화장실로 간다. 불필요한 수분을 몸에서 빼낸 후 얼굴도 닦고 이까지 닦아 버린다. 상쾌해진 것 같았다. 물론 수건에서 냄새가 났다면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이 순간에도 음악은 흐르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의자에 앉아 방안의 물건들을 훑어본다. 혹시라도 그 무엇이 있을까 해서. 없었다. 아니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난감했지만 이런 상황은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기에 무덤덤하다는 감정으로 덮어 버린다. 시디와 책이 꽂혀있는 정육면체의 엠디에프 앞에 주저앉는다. 화집, 사진집, 여행기, 소설책, 시집, 에세이등이 눈에 들어온다. 그중 아무거나 한 권 골라 책장을 넘긴다. 누가 읽으라고 쓴 글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어렵고 재미도 없었다. 제목이나 한번 본다. ‘죽음의 한 연구’ 실컷 연구하라지, 난 안 읽을 거니까. 여러 권의 책들이 눈을 거쳐갔다. 재미없었다. 사실 그것들을 읽고 생각하고 감상할 마음의 여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디에 허비한 것도 아닌데. 원래 없었나 보다. 제목이 적혀있지 얺은 노트가 몇 권 보인다. 모두 제 각각이었다. 내 일기장이었다. 내 지난 시간들, 생각들, 감정들, 추억들.... 지난 일기들이나 봐야겠다. 여러 권의 일기장중 하나를 빼내어 읽기 시작한다.


1997.11.14

날씨도 흐리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왠지 오늘은 시내 한 복판에 있는 높은 빌딩 속을 거닐고 싶다.

약속 없는 곳을 헤매며.


1998.5.4

맥주 두병, 담배 한 개비, 탄 팝콘, CNN 방송


1999.3.15

갑자기 갔다.

마음속의 바람이 바로 행동으로. 모든 일이 그랬으면 좋겠다.

일출을 보지는 못했지만 바다는 거기에 있었다. 높은 파도와 함께.

싸늘한 바다 바람을 맞기에 내 마음은 너무나도 얇았다.

잠시 바닷가를 거닐고 이미 떠버린 태양을 바라보았다.


1999.3.17

대관령인가 여기가.

설산을 배경으로 달리는 차들은 어디로 가는지 다 바쁘기만 하고.

며칠 전 이곳에 폭설이 내렸다더니 정말 온통 하얗다.

눈의 무게를 못 이겨 축 쳐진 나뭇가지가 고통의 무게에 짓눌린 나의 어깨와 비슷하다. 

하지만 나뭇가지의 모습은 너무 아름답기만 한데.

나의 모습은 어떻게 보일는지.


1999.3.21

음악은 들려서 편하다.

어떠한 노력도 없이 단지 귀를 열고 있으면 된다.


1999.4.2

매일... 생각날 때마다 쓴다. 나의 오늘은 이렇고 저랬다고.

그때의 내 생각과 감정들과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자아를 상실한다는 건 너무 겁나고 무서운 일일 것이다.

난 지금도 이렇게 살아있다고 소리 없이 외치고 있다.


어떤 일이 해결되길 바라며 술을 들으키는건 아니다.

단지 견딜 수 없는 이 순간이 이유다.


1999.4.5

한가한 휴일 오후다. 사실 내겐 언제나 휴일이지만.

오후에 종로로 외출한다. 버스가 흔들린다. 그런데 나도 흔들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걸까?


1999.4.10

시간이 너무 빠르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혀로 느끼는 행복이 포만감으로 바뀌고

또 거북함으로 이어지는 시간처럼.


1999.4.11

빨간 잉크가 묻은 건가? 노트도 많이 헐었네.

내 물건들 조차도 나도 모르게 변해 가니 슬프네.


1999.4.12

리플레이. 듣고 또 듣는다. 먹고 싸고를 반복하듯이.


1999.4.17

못 본 척! 어려워서, 어색해서, 보기 싫어서?


1999.5.18

생각하는 사람.

깊은 고뇌에 빠져있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어딘가를 주시하는 것은 아닐까?


1999.5.24

잠이 오지 않아 담배를 꺼내 들었다.

창문을 열고. 어느새 소리 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이 조용한 밤이 즐길만하다는 것을 다시 느낀다.

아무도 없는 길을 비추고 있는 은은한 가로등이 너무 슬프지만 멋지게 보인다. \

요즘 몸이 심상치 않다. 괜한 걱정일지도 모르겠다.

글쎄. 힘든 건가, 지친 건가?

하여튼 조용하고 촉촉한 이 밤이 날 조금이나마 위로해 준다.


1999.5.26

버스 안이다. 출발을 기다리며 흐르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다.

여긴 신호도 없고 사방에서 경적을 울리며 재촉하는 차도 없다.

시골길에 오로지 이 버스 한 대만이 서있을 뿐이다.

이젠 상쾌한 공기를 맞대며 달리려나 보다.

덜컹거리는 버스. 거기에 움직이는 내 몸. 굳어진 몸이 풀어지려나?


1999.5.29

제발. 난 하고픈 일들이 너무 많아.

날 도와주진 않아도 돼. 단지 내버려 두면 돼.

제발. 시간은 생각보다 너무 빠르단 말이야.


1999.6.6

벤치에 등을 깔고 누웠다.

올려다본 하늘에 박힌 혹은 이리저리 몸부림치는 나뭇잎이 너무나 선명하다.

내 시야의 반 정도를 가린 나뭇잎은 너무나도 많다.

반인데. 반이라는 수가 이렇게 클 수가!

난 지금 반은 희망이고 반은 절망이다.


담배 연기는 너무나도 미세하고 섬세하다.

아까 뿜어 뱉어냈던 연기가 벌써 허공에 스몄으니 말이다.

다시 뱉어 낸다. 허공에 아주 조심스럽게.

뿌연 연기는 표현할 수 없는 형체를 이루며 조금씩 떠오른다.

부드럽게. 손가락을 그것에 가져간다. 그리곤 흔든다.

나의 이런 행동에 거부감을 느꼈는지 연기는 또 어느새 허공에 묻혀 버린다.


반 지하의 조그마한 방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날 비참하게 한다.

2 중창에 또 하나의 쇠창살. 흐리지만 높아 보이는 하늘이 날 조롱하는 듯하다.

그렇다. 단지 난 침대에 누워 작은 사각형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내 모습은 죄인이나 시체 같은 것이다.

환풍기는 쉬지 않고 돈다. 소리를 내며. 듣기 싫지만 그것을 멈춰버리면

감당할 수 없는 고요가 날 외롭고 두렵게 한다.

난 오늘도 듣는다. 그렇기 때문에.


1999.6.10

배고픔에서 거북함으로 이어주는 순간. 후회해도 소용없다.

다시 배고픔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잠들기 전에.


1999.6.12

일산은 너무 행복해 보인다.

지하철에서 졸았지만 종점까지 가지 않고 내렸다. 힘이 들었다.

오후의 아른함과 그간 쌓였던 피로. 지쳤다.

그래 이 표현이 가장 정직하고 어울리겠다.

공원, 거리. 편안한 가족 냄새가 풍긴다. 아, 오늘은 주말이다.

그들이 행복을 느끼는 주말. 축져진 내 어깨처럼 해도 넘어간다.

배가 고프다. 저들은 배도 고프지 않을 것 같다. 행복해 보인다.


1999.6.13

커다란 창밖으로 아침을 알리는 빛이 가득하고 나는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게으름을 피운다.

음악을 틀었다. 내 게으름을 도와줄 것이다.

즐겁게 말이다. 이 순간. 행복하다.


집으로 걸어오던 중 횡단보도에 멈춰 섰다.

전화기를 손에 들고 있다가 놓쳐버렸다.

‘탁’ 소리와 함께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힌 전화기는 배터리와 분리되어 날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전화기는 망가지지 않았다.


1999.6.15

어지러워. 머리 아파. 자고 싶어. 죽고 싶어.


1999. 6.21

3월쯤일 거다. 꽃잎 몇 개를 땄다.

촉촉한 미백색의 꽃잎은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나의 이기심에

지금 이렇게 죽은 채 붙어있다. 변했다. 다시 돌아갈 순 없겠지.


1999.6.23

비가 내린다. 장마 일지 모른다. 내리는 빗소리를 안주삼아 친구 삼아 와인을 마신다.

떫은맛이 혀에 달라붙어 다음 잔을 재촉한다.


1999.7.15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이 기분. 그것에 난 사로잡혀 있고

옆방에서는 보지도 않는 티브이 소리가 힘없이 들린다.

이에 질세라 환풍기는 몇 주일째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다 읽었다. 스프링 제본이 된 검은 노트에는 일기 외에 낙서들과 사진 그림들로 차 있었다. 흔적들. 또 다른 일기장을 집어 본다. 다시 내려놓는다. 한꺼번에 읽기 아까웠다면 우스울까? 하여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허리를 굽히고 있어서 그런지 허리가 아팠다. 일어서서 팔을 벌린 채 하체는 움직이지   고 상체를 좌우로 흔든다. 뚝뚝 소리가 났다. 좀 나아진 것 같다. 무언가 먹어야겠다. 냉장고로 발걸음을 옮겨 문을 열어본다. 물과 맥주 한 병, 소주 2병, 반쯤 남은 콜라. 밥이 될 만한 것은 없다. 사실 알고 있으면서도 누군가 냉장고에 먹을 것을 넣어 두고 갈 가능성이 없는 걸 알면서도. 책상 위의 동전통에서 동전을 긁어모은다. 2400원. 음식을 시켜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어떻게 하면 그 돈으로 맛있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해 보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하루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기분 나쁜 햇살이 나를 대한다. 덥고 끈끈한 저 빛이 난 싫었다. 두려웠다. 슬리퍼를 신고 언덕길을 내려간다. 슬리퍼 앞쪽으로 발이 쏠린다. 가까운 곳에 편의점이 있어서 좋았다. 그곳으로 들어선다. 우선 새우맛이 난다는 컵라면을 하나 골랐다. 그리곤 형광등이 켜있는 쇼케이스에 진열된 김밥코너로 간다. 라면 값을 먼저 계산한다. 700원. 그럼 1700원이 남는다. 700원짜리 삼각김밥과 800원짜리 주먹밥을 골랐다. 200원을 제외한 동전들을 점원에게 내민다. 다행히 500원짜리 동전도 있었다. 라면에 물을 부어 언덕길을 올라온다. 조금이라도 빨리 먹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땀이 났다. 계단을 두 개씩 오르고 집 문을 연다. 컵라면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봉지 안의 삼각 김밥과 주먹밥도 꺼낸다. 먹기 전 세수를 한다. 손도 닦을 겸 해서 말이다. 이번에도 상쾌함 비슷한 것을 느끼고 수건에 얼굴을 가져간다. 냄새가 나지 않았다. 나무젓가락 포장을 벗겨내고 반으로 가른 후 컵라면을 집어 든다. 익숙한 냄새를 담은 김이 올라왔다. 나쁘지 않았다. 꼬불꼬불한 면발을 집어 든다. 많이 집고 싶었지만 그러면 너무 뜨겁다. 조금씩 먹어야 한다. 삼각 김밥과 주먹밥도 뜯는다. 차가웠다. 냉장보관되어 있던 것이니 차가운 게 당연하지. 라면은 뜨겁고. 번갈아 가면서 먹는다. 삼각김밥은 내용물이 알차지 못했다. 약간의 참치가 들어 있을 뿐 그냥 삼각형 밥 덩어리 같았다. 주먹밥도 다를 건 없었다. 그래도 라면 국물과 같이 먹으니 한결 낫다. 다 먹었다. 배도 불렀다. 담배를 피울까 하다가 치우고 피우기로 한다. 남은 라면 국물과 찌꺼기를 변기에 부어버린다. 붓는 동시에 물을 내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변기 주위에 시뻘건 라면 기름이 묻기 때문이다. 비닐봉지에 쓰레기들을 담아 버렸다. 이제 담배를 피울 차례다. 이런! 담배가 없다. 재떨이에 사정없이 쑤셔 박힌 꽁초들을 살펴본다. 혹시 장초가 남아 있지는 않을까 해서. 있다! 장초가 한 개비 꽂혀 있다. 필터에 묻어 있던 이물질들을 털어 버리고 불을 붙인다. 담배 맛은 비슷했다. 다만 짧을 뿐이었다. 길게 아주 길게 연기를 마시고 그만큼 길게 내뿜는다. 몇 번 그러길 반복하니 뜨거워서 더 이상 피울 수가 없었다. 물을 마신다. 좀 쉬어야겠다. 침대와 옷장 사이의 바닥에 등을 대고 몸을 눕힌다. 눈뜨고 처음 피운 담배여서인지 현기증이 났다. 그 순간 흐르던 음악이 끊겼다는 걸 알았다. 정확히 언제 끝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멈춰있다. 다른 시디로 바꾸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린다. 몸을 일으켜 책상 위의 전화기를 집어 든다. 폴더를 여는 순간 반갑지 않은 번호가 뜬다. 발신번호 표시에 의하면 신용카드 회사였다. 나는 연체 중이다. 그래서 그들은 날 매일 같이 괴롭히고 난 피한다. 전화벨이 끊기고 전화 액정 화면에 부재중 전화라는 표시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다. 14초 걸렸다. 그 시간이 왜 이리 길게 느껴지는지. 누웠던 자리로 돌아가 같은 자세를 취한다. 천장을 바라본다. 새로 도배된 벽지가 깨끗했다. 자세히 보니 검붉은 점 같은 것이 하나 눈에 띄었다. 모기의 시체가 눌린 자국이었다. 며칠 전 내가 그랬다. 사정없이 짓눌러 죽여 버렸고 그는 내 몸에서 빨아들인 피를 온몸으로 토해냈다. 난 기분이 좋았지만 깨끗한 벽지가 더 이상 모기의 시체로 더럽혀지지 않았으면 한다. 가끔 나의 피를 훔쳐가지 않은 모기의 시체를 치우노라면 약간은 미안한 마음도 든다. 하지만 어떤 모기가 나의 피를 훔쳐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냥 모기가 보이면 죽이는 수밖에. 예방차원에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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