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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Jan 09. 2020

오늘 같은 어제 5

다섯 번째 일기장

아름답고 값진 기억들이었지만 부작용이 생겼다. 여행 가고픈 생각이 간절해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떠날 수가 없다. 단지 마음만 괴로울 뿐이다. 빨리 접어야지. 스트레스받기 싫다. 얼굴을 침대에 파묻고 이리저리 문지른다. 그리곤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린다. '안돼, 안돼, 빨리 잊자. 지금은 아니야.' 몸을 벌떡 일으켜 책장 앞으로 간 후 책을 제자리에 꽂는다. 보이지 않게 깊숙이. 이럴 때 마음을 가라 앉히기 위해 담배를 한대 피우면 좋으련만 꽁초까지 피워 버렸으니. 담배를 사러 나가기도 싫고 살 돈도 없다. 할 수 없이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낸다. 라이터의 뒷부분으로 병뚜껑을 따자 뻥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오른다. 시원하다는 뜻이다. 투명하고 기다란 컵에 거품이 많이 나도록 따른다. 단숨에 마시고 다시 따른다. 시원했다. 단지 그 생각만 났다. 그렇게 시원했다. 전잔보다는 거품이 적게 나는 맥주를 계속해서 마신다. 더 이상 따를 수 없을 때까지. 이제 다른 일기장을 읽어도 되겠다. 이번에 읽을 일기장은 가장 작은 적색 노트였다. 


2000.9.4

모두들 바쁘게, 뭣 때문인지는 모를지라도

하여간 그렇게 살아가느라 어느 순간 생각해 보면 참 놓친 것이 많다. 


2000.9.22

꿈을 꿨다. 꿈과 현실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 나와 타인의 경계.

난 어디 있을까? 


2000.9.25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냥 내일을 맞이하며 아쉬워 하지만

그날들이 기대되는 건 떨칠 수가 없다. 그런 걸까? 


2000.10.7

알 수 없는 것들. 얼마나 다가갈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2000.10.18

열쇠고리가 하나 있다. 하지만 열쇠가 하나도 없다. 

때문에 아직 열쇠고리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 난 서랍 속에서 그것을 꺼내 한 번씩 만져보곤 한다. 

열쇠를 기다리는 그 열쇠고리를.


2000.10.19

이별이 눈물일까?


2000.10.20

어둠이 걷힌 걸까? 아니면 밝음이 덮은 걸까? 눈동자가 시리기 시작한다.


2000.10.28

하늘이 흐리게 흐른다. 17% 정도 검은색을 띠고 있다. 

그리고 내 가슴은 83%가 답답하다. 

하고픈 걸. 내가 원하는걸. 재미있는 걸. 하자. 내 마음이니까.


2000.11.2

글은 지어내는 것일까, 쓰이는 것일까?


2000.11.3

의무다. 글이 요즘 뜸하길래. 이렇게 한 줄이라도. 이러지 말자. 

의무는 곧 강요가 안닌가? 씨발!


2000.11.5

허리가 아파 몸을 돌려보지만 마찬가지다. 

강한 햇살은 벌써 지고 있었고 그것은 움직이며 내 감긴 눈을 자극했다. 

곧 감 긴 눈이 살짝 벌어지고 지저분한 느낌들이 몰려온다. 

꿈은 과거로 모두 사라졌고, 또다시 보내야 하는 이곳에서의 시간, 

헝클어진 머리와 부은 눈. 잃어버린 시간들과 상대적으로 늘어난 꿈속 시간들. 

목이 마르고 아프다.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서 일 것이다. 

이를 닦고 싶은데, 칫솔을 가지러 가기가 귀찮다. 배도 고프려 하는 것 같은데, 

아직 뱃속에 남은 알코올이 감각을 둔하게 만들어서 인지 참을만하다. 

음악도 들린다. 사람들 소리도 들리고. 머릿속의 울림도 들린다. 오후 3시였다. 


2000.11.9

3시간가량의 잠. 어설픈 시간대의. 

현실과 다른 편의 많은 이야기들. 또는 그들의 경계. 

덜 깬 눈과 멍함. 감기였다. 아마도. 


2000.11.14

사람들은 안정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나도 안정을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안정을 위한 안정은 아니다. 


2000.11.19

눈꺼풀의 반응이 느려진다. 몸도 점점 편안해지고 싶어 하고. 창밖을 보기 두렵다. 

또 다른 오늘이 날 쳐다보고 있으면 난 똑바로 그를 쳐다볼 수가 없다. 

시계는 벌써 내일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할 일이 분명히 많았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면 안 될 것 같은데. 온몸이 슬프다. 


2000.12.1

바닷가로 향한다. 회를 먹었다. 푸짐하게. 맛있었다. 

속초해수욕장에 들러 1시간 정도 바다를 바라본다. 

시원했다. 상쾌했다. 그리곤 난 넓어졌다. 돌아온다. 저녁이었다. 

내일이 전시회 리뷰다. 할 일이 많다. 

하지만 잘되리라. 난 바다를 보고 왔으니까.


2000.12.23

1주일이 넘어버렸다. 

전시회도 끝나고 그동안 많이도 게을렀고 

많이 즐겼고. 이제 시작해야겠다. 비웠으니까.


2000.12.26

잘 움직이지 않는 몸과 굳어버린 블루베리 치즈케이크. 

한대수의 음악과 단상들. 의미 없이 느껴지는 시계 속의 숫자들. 

어제는 크리스마스였다. 


2001.1.4

늦은 아침 식사로 라면을 끓인다.

거의 맛도 느끼지 못한 채 그렇게 먹어치우고 나니 배는 부르더라.

담배 피우고 배설하고.

그냥 채우지만 말아야지 하면서도 되풀이되는 일들이 쌓여간다.


2001.1.5

모든 것이 가운데쯤에 머무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도 없다.


2001.1.7

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집안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일을 찾았다.

그다지 새로운 것이나 즐거운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시간은 가더라.

숫자만 바뀌는 내일이 또 오겠지. 


2001.1.8

요즘 허리에 통증이 자주 온다. 아마도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인 것 같다.

누워서 천장을 바라본다. 그리 낮지도 높지도 않은 그것을.

하늘이 보인다면 좋겠지만 내겐 천장을 뚫고 하늘을 바라볼 능력이 없다.

아쉽다.


2001.1.11

게으름의 연속으로 무료함과 신경질적 반응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확실치 않은 주위의 일들이 무의식 속에 쌓여 날 이렇게 만든다.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한 텅 빈 머리를 들고 다녔던 것이다.


2001.1.12

귀는 음악에 취하고. 입은 알코올에 취하고.

코는 담배 연기에 취하고. 눈은 볼 것 없음에 취한다.


2001.1.18

누군가 만나고 싶은데 만나서 뭘 하지?

음악은 끊기고 시간은 지난다.


2001.1.20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처럼 슬픈 일은 없다.

메말라 버린 눈물이 어디로 숨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원망스러운 건 알 수 있다.


2001.1.21

뭐든 이유가 있겠지.

내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도. 그렇게 믿자.


2001.1.22

또다시 무작정 떠나왔다. 제천이다.

내일이 다가오기 몇 분 전 역 근처의 여관에 몸을 쉬게 한다.

이제 무엇이든 생각하고 느끼는 일만 남았다.


2001.1.23

11시쯤 여관을 나선다

몰라보게 바뀌어버린 거리를 기억을 꺼내어 발걸음을 옮긴다.

허기진 배를 먼저 채워야겠다. 서서히 되살아 나는 기억으로

시장으로 들어서 순댓국 한 그릇을 비운다. 옛 기억을 더듬는다는 것.

그곳을 다시 찾는다는 것. 잊혀져 가는 시간을 두려워하는 것.


4시 13분 서울행 기차에 오른다.

잡지 한 권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다가 창밖으로 눈길을 준다.

한 번쯤은 보았음직한 풍경들이 자꾸만 뒤로 흘러 버린다.

언제 다시 흘러가 버린 풍경을 거스를지 모르겠다.

40분 후 난 서울에 도착한다. 복귀한다.

2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에 있는 그곳을 14년 만에 찾게 되었는데.

그것도 나의 충동적인 행동으로. 알 수 없는 내일과 경험들.


2001.1.24

거짓말처럼 난 다시 선릉에 위치한 집에 돌아와 있었다. 울어대는 오디오.

테이블 위의 맥주와 말라비틀어진 안주들. 이젠 담배 연기를 뿜을 차례다.


2001.1.28

일요일 느지막한 오후. 나가려 한다. 맞으러. 지는 해를 맞으러.


2001.2.3

친구가 말한다. 

그런 슬픈 눈 하지 마.

그렇게 슬퍼 보였을까 나의 눈이. 

왜 슬플까 나의 눈은? 


2001.2.7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내게 다가왔다.

게으름에 묻혀 있던 나를 꺼내 줄 그 무엇이 왔다.

달아나지 못하게 가둬버려야겠다.


2001.2.11

내가 언젠가 얘기했었는데. 술처럼 정직한 것은 없다고.

오래될수록 좋고 그만큼 비싸다고. 내가 왜 그렇게 느끼고 말했는지.

난 그렇게 술처럼 정직하지 않은데 말이지.


2001.2.14

연어. 캐이퍼. 치즈 그리고  Noble Medoc. 나의 저녁식사.


2001.2.18

한 평 반 정도 되는 이 공간에서 지내야 한다.

글쎄. 박스는 말없이 쌓여만 있고 티브이는 어디서나 울어댄다.

난 그저 하늘을 막고 있는 천장만 바라본다.


2001.2.21

배부른 채 티브이를 본다. 입 운동은 계속된다.

거짓말처럼 아무런 걱정이 없다. 고민들과 잡생각들은 날아갔다.

아니 잠시 숨겨버린 듯하다. 나도 동물이다.


2001.2.26

오늘은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았다. 나도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냥 별 생각도 없다. 단순하고 뻔한 스토리의 드라마를 보다 눈 앞이 흐려졌다.

이런 것에도 눈물이 있었구나!

참 단순하고 쉬웠다. 이런 게 사는 건가 싶더라.


2001.3.1

세상에는 슬픈 일이 많다. 아름다운 슬픔들. 눈물. 잊혀짐. 그리고 남겨짐.

또 하루가 지나간다.


2001.3.4

시계는 매일 아침 내게 거짓말을 한다.

이건 아침이 아니다. 내게 아침은 없다.

단지 시계의 숫자 장난이다.


2001.3.9

세상에는 나 혼자지? 왜냐하면 난 하나밖에 없으니까.


2001.3.10

내가 지금 힘들고 외롭다고 흘려보내는 눈물은 사치다.

난 단지 세상을 향해 투정거릴뿐이니까. 일어나 보자. 다름 아닌 내가.


2001.3.11

눈물은 어디서 나오는가?

눈에서 나온다. 눈은 빛이고 빛은 곧 나다.


2001.3.12

한번 나가보면 어떨까?

정신이 육체를 떠나 마음대로 떠다니면 어떨까?


2001.3.15

가벼움이란 무엇이고 그 기준은 무엇인가?

가벼운 것은 나쁜 것인가?


2001.3.18

거처를 또 옮긴다. 어제는 홀로 여관방에서 밤을 보냈다.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내게.

무슨 일들을 벌리려 하는 걸까 나는.


2001.3.21

사랑은 아름다운 것인가?

영원하리라 믿던 그 순간만 에라도.


2001.3.22

상처 받지 말란다.

상처는 누군가에게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게 주는 그 무엇이다.


2001.3.26

26일이다. 내장 속 가득한 오물들을 쏟아 버린다.

내가 어딨는지 무얼 하는지 또 모르겠다.


2001.3.27

펜은 노트의 조그만 공간을 써내려만 간다.

이 주어진 공간이 나로 하여금 채워주길 원하는 것인지

나의 보잘것없는 펜은 말없이 계속 바쁘다.


2001.3.29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던 지난겨울이었다.

하얗게. 그렇게 눈 시리도록 하얗게 세상을 덮었지만

결국에는 저렇게도 더럽게 녹았구나. 슬프다.


2001.3.30

내 방 안으로 비추는 빛줄기 하나.

하지만 내 눈물은 두 줄기다.


20014.1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 두렵다.


2001.4.2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왜 난 항상 취해야만 하는 것인지.

무엇인가에 미치도록 열정적이지 못하고 하찮은 정신 마취제에 몸을 맡겨버리는지. 

나약하다. 한없이 약하다.


2001.4.6

동물원에 갔었다.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반겨주는 따사로운 햇살과 강하지 않은 바람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준비한 음식들을 적당한 자리에 앉아먹어 치운다.

제길, 더 이상 쓰기 싫다.


2001.4.6

최악을 생각해야겠다. 최고만을 생각해 왔던 것이다.


2001.4.8

더 이상 함께 있지 못하다.


2001.4.14

노트를 펴는 순간 쓴웃음이 베어 나온다.

많이 지나있었다. 어디로 가버린것이가?

그들이 가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버렸겠지. 많이 버렸다.


2001.4.15

날아간다. 그곳을 향해 팔을 한번 벌려본다.


2001.4.17

이곳에서의 생활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나버렸고 운동화는 뜨거운 물에 담겨있다.


2001.4.26

정해진 공간에서 수많은 잡생각들이 맴도는 순간에도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있다. 결코 멈출 수 없는 시간이다.


2001.4.27

격렬한 울음보다 더 슬픈 눈가에 고여 흐르지 않는 눈물.


2001.4.29

담배연기보다 건조한 하루가 더 이상 하루로 그치지 않는다.

어느새 살아온 날들의 부분으로 남았다.


2001.4.30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꽃의 슬픔과 허무.


2001.5.1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내 몸은 하나인데 수많은 생각들과 가능성들은

그 하나의 몸마저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통제할 수 없다.

떠나고 싶다. 다른 공기 마시러.


2001.5.13

시계가 멈춰버렸다. 2년간 쉬지 않고 돌더니.

11시 1분 27초 에서 바늘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한다.

그 순간에도 시간은 조롱하듯 흐르고 있었다.


2001.5.14

무거운 눈꺼풀이 그립다.


2001.5.15

잠이 안왔다. 싫어하는 소주와 3500원짜리 싸구려 냉동 족발.

그것들이 날 재워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바보. 정말 바보다.


2001.5.16

잠에서 깨어보니 이틀이 지나 버렸다.


2001.5.17

부른 배를 안고 누운 채 티브이를 켠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티브이 속에서 움직이는 영상과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이 어우러진 후덥지근한 오후의 풍경.


2001.5.22

거북할 만큼 배가 부르다.

후덥다. 지긋이 열어놓은 방문 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오기는 하지만 부족하다.

넘침과 모자람이 나의 새벽을 채우고 있다.


2001.5.30

나를 화려하게 보는 사람이 있다.

누구보다 화려해서 빛을 발한단다.

바보. 아무것도 모르면서.


2001.6.7

사소한 것에 흐르는 눈물. 내겐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흘리고 싶었던 것이다. 힘들고 기쁘고 아름다운 눈물들을.


2001.6.18

새날이 젖어간다. 어느 순간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일정한 파찰음을 만들어 낸다.


2001.6.19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


2001.6.21

매일 같은 비디오 테이프를 돌려본다. 이제 닳을 때가 된 것 같은데.


2001.6.25

술이 날 먹어 버렸다. 취한 상태에서의 행동에 의문이 간다.

본능적이고 솔직한 고백인지 단지 과장된 횡설수설인지.


2001.7.1

결코 져버릴 수 없는 기다림과 기대. 그 이상의 실망과 허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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