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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Jan 15. 2020

아직은 부를 수 없는 아들의 이름

아이를 갖기 전부터 나와 마리는 아이의 이름을 지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2세를 계획한 것도 아닌데 그저 미래에 아이가 생긴다면 이런 이름을 지어주자며. 아마도 그때부터 이도를 맞이할 준비를 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너무 전형적인 한국 이름이나 독일 이름은 피하고 받침이 없어서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국제적인 혹은 국적불명인 이름이어야 한다는 조건하에 수많은 이름을 써내려 갔다. 받침이 많은 한국의 일반적인 이름은 현지인이나 이 곳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불리기에는 결코 쉬운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베를린에 살고 있는 주변의 한국인들은 대부분 발음하기 쉬운 현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나 역시 이 곳에서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안영빈‘ 이 아닌 ‘vin 빈’ 으로 불린다. 내 실제 한국 이름을 아는 친구가 거의 없어서 공식적인 자리에서 내 본명을 이야기할 때면 ‘너 원래 이름이 이거였어? 어떻게 발음하는 거야?’라는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보곤 한다.


많은 후보 중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여성 이름으로 쓰이는 ‘Ida 이다’라는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들어 첫 째가 딸이면 그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내 姓 성을 붙여 ‘Ida Ahn 이다 안’, ‘안이다’. 독일에서는 엄마 아빠의 姓 성을 함께 쓰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아빠의 성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혼인을 하면 부인이 남편의 성으로 改姓 개성을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Anna Schmidt 안나 슈미트라는 여자가 Helmut Müller 헬무트 뮐러라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을 따라 Anna Müller 안나 뮐러로 이름이 바뀌는 것이다. (만약 이혼 후 재혼을 하게 된다면 또다시 성이 바뀌게 된다!) 우리 부부의 경우에는 국제결혼이기도 하고 독일 이름에 한국 성만을 붙여 쓰는 것이 어색해서 장인의 성에 내 성을 더해서 쓰기로 했다. Marie Otto 마리 오토에서 Marie Ahn 마리 안 대신 Marie Otto-Ahn 마리 오토-안으로.


“만약 첫 째가 아들이면 어떡하지?”

“아들이어도 ‘이다’라고 하면 안 돼?”

“안돼, 킨더가르텐에서 놀림받을 거야. 남자아이가 여자 이름을 가졌다고”

“그래? 그럼 그때 가서 생각해 보지 뭐.”


임신 12?주가 지나고 태아성별검사(독일에서는 부모가 원하면 태아의 성별을 알려준다.)를 통해 아들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 우린 ‘이다’를 포기하고 다른 이름을 지어야 했다. 킨더가르텐에 가서 놀림받지 않을 만한 남성적인 이름으로. 에곤, 아노, 이노, 하노, 히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게다고 썩 맘에 들지도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흘렀지만 맘에 드는 남자아이의 이름은 어디엔가 꼭꼭 숨어 우리를 애타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나 맘에 들었던 이름을 제쳐두고 새로운 이름을 짓기가 아쉬워 ‘Ida 이다’의 알파벳 철자 I, D, A 를 적은 후 A 대신 다른 모음을 조합해 써내려 갔다. Ida, Ide, Idi, Ido, Idu. Ido 이도? 괜찮은데!


“마리, 이도어때?”

“이도? 음... 괜찮은 것 같은데.”

“이도, 이도 안, 안 이도. 맘에 들어. 난 이 이름이 아주 맘에 들어!”

“근데 이도가 무슨 뜻이야? 한국어로 뜻이 있어?”

“글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부르기 쉽고 어감이 좋잖아.”

“ 그래도 한국어로 무슨 뜻이 있으면 더 좋겠는데...”


부랴부랴 한국어사전을 뒤져봤지만 ‘이도’라는 우리말 단어(한자어가 아닌 순우리말)는 없었다. 한자를 조합해서 뜻을 만들면 어떻겠냐는 나의 제안에 마리는 흥미를 보였고 그때부터 인터넷으로 한자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의 음을 가진 한자 582건과 ‘도’의 음을 가진 한자 236건이 검색되었다. 두 한자를 조합해서 나올 수 있는 이름의 개수는... 계산할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숫자라는 정도만 짐작할 뿐! 그래도 끝은 있을 테니 한 번 천천히 해보자 하는 심정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한 자 한 자를 훑어 내려갔다. 운이 좋았던 것일까? 시작한 지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마음에 꼭 드는 한자가 나타났다. 기쁠 ‘怡 이’. ‘도’ 자는 거의 반사적으로 길 ‘道 도’ 자가 떠올랐다. 기쁠 ‘怡 이’에  길 ‘道 도’ 자를 쓴 怡道 이도, 기쁜 길. 내 성을 따라 편안할 ‘安 안’ 자를 붙이니 安怡道 안이도. 편안하고 기쁜 길. 아, 좋다! 내 이름과 바꾸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마리 역시 내게 이름의 뜻을 듣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기뻐했다.


일종의 미신이랄까? 출산 전까지는 이름을 이미 지었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태명을 부른다.‘이도’역시 태어나기 전 까지는 태명인 ‘半半 반반’ 으로 불렸다. 엄마의 ‘半반’과 아빠의 ‘半반’이 합쳐져 이루어진 태아. 엄마에게서 ‘半반’ 그리고 아빠에게서 ‘半반’을 닮으라는 뜻이기도 하며 반은 한국인 반은 독일인이라는 뜻이었다. (출산 전까지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경우로 독일에서는 생일이 되기 전에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듣는 것은 불운으로 여겨 절대로 하지 않는다.) 너무 마음에 드는, 좋은 이름을 지어놓고 아직 부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그렇게 해서 임부가 마음이 편하다면야 내가 조금 참아야지. 뭘 못하겠는가!


아직은 부를 수 없는 아들의 이름을 가끔씩 노트에 적어보곤 했는데 알파벳으로 I, D, O 의 띄어쓰기를 달리하다보니 ‘I do’ 라는, 주어와 동사로 이루어진 너무나도 간단한 문장이 만들어졌다. ‘I do 내가 한다.’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느낌이... 마리에게 보여주니 약간은 어이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부르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은 ‘이도’라는 이름과 사랑에 빠져버린 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나오기만 해 봐라. 실컷 불러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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