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차를 끌거나 아기띠를 둘러매고 일상을 즐기는 아빠들의 모습은 Prenzlauer Berg 프렌츨라우어 베르그를 거닐다 보면 흔히 보이는 풍경 중의 하나로 이도가 태어난 이후 나 역시 그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아침에 이도를 Kindergarten 킨더가르텐에 데려다주거나 오후에 데리러 가보면 통학을 맡은 엄마 아빠의 비율이 거의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남과 여 혹은 엄마와 아빠의 역할이 정해져 있는 한국과 달리 독일에서는 가사를 비롯한 육아는 물론 경제적인 문제 역시 합리적으로 분담한다.
* 2019년 한국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세대들이나 남과 여 혹은 남편과 부인으로서의 평등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내가 언급한 위의 내용이 오래전 한국을 떠나 요즘 한국 상황에 어두운 구세대 이민자? 의 의견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주위를 둘러보시라. 공평하게 가사를 분담하는 남녀가 얼마나 되는지, 제대로 된 육아휴직을 써 본 아빠가 얼마나 되는지...
우리 부부 역시 7년 전 처음 만나서 동거를 시작한 시점부터 가사와 생활비를 공동으로 부담하고 있는데 가장 큰 장점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며 서로의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아빠는 하루 종일 돈을 벌기 위해 회사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고 엄마는 온종일 집안일과 육아라는 전쟁에 뛰어들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모든 일을 함께 나눔으로써 어려움을 덜고 서로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관련 정책과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독일에는 Elternzeit 엘턴차이트라는 정책이 있다. 출산 후 육아를 위해 최대 3년 동안 휴직을 보장하는 제도로 휴직기간 중 최대 14개월 동안 *Elterngeld 엘턴겔트라는 일종의 생활보조금을 정부에서 지급한다. 별도로 지급되는 양육수당은 출산 후부터 아이가 만 18세가 될 때까지 베를린 기준으로 매달 약 190유로가 지원되며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이다. 대학은 도시마다 차이가 있지만 거의 공짜나 다름없다. 이러한 지원을 바탕으로 모든 부모들은 육아와 함께 시작될 새로운 인생을 준비할 수 있다.
* 두 명의 보호자가 14개월을 나누어 사용하며 한 사람이 최대 12개월까지 신청 가능하다. 신청자가 소득자일 경우 월급의 67%, 최대 1,800유로를 매달 지급하며 주부이거나 학생 또는 무직인 경우에는 매달 300유로가 일괄적으로 지급된다. 우리 부부의 경우에는 마리가 12개월 동안 엘턴겔트를 받으며 육아휴직을 했는데 출산 전과 비교하여 경제적으로 큰 차이는 없었다.
출산을 한 마리 그리고 세상에 갓 태어난 우리 아기와 함께 우리 세 식구가 보낸 1년은 또 다른 인생을 준비하고 알아가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마리에게 미역국을 끓여 먹이고, 손에 묻은 똥오줌에 더 이상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될 만큼 기저귀를 갈아주고, 잠을 편하게 잔 적이 단 하루도 없지만 우리 세 가족은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정도로 가깝게 지내며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을 함께 즐겼다. 단지 문서로만 존재하는 정책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이기에 우리 부부뿐만 아니라 육아휴직을 원하는 모든 부모가 소중한 새 생명과 함께 이러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베를린에 평생 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실질적인 복지혜택을 받으며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이 도시가 난 좋다. 다른 사람이, 특히 한국의 일반적인 30-40대 가장이 나의 일상을 지켜본다면 어떻게 이리 게으르게 살 수 있을까라고 묻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난 여유로운 것이지 게으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게으름과 여유로움의 차이는 뭘까? 얼핏 보면 그 둘은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속내는 차이가 크다.
내게 여유로움은 할 일은 다 하면서 쫓기지 않고 천천히 가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의 특성상 남들처럼 일주일에 5일, 하루에 8시간 혹은 그 이상을 규칙적으로 일을 하지 않아 되지만 나 나름대로의 규칙적인 생활이 있다. 우리 가족이 먹을 음식을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내가 직접 정성 들여 만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2-3일에 한 번 꼴로 장을 봐야 하고. 이도가 킨더가르텐에 가고 나면, 마리가 출근하고 나면 집안을 청소하고 정리하고. 부족한 아기용품이 있으면 사다가 채워놓고. 그러고 나서 시원하게 샤워를 한 후 나의 한가로운 일상을 즐긴다. 우리 집에 방문한 지인이나 친구들은 의외로 깔끔하고 정리정돈된 살림살이를 보고 놀라곤 한다. 한 일본 친구는 자기가 베를린에서 본 집 중에 가장 깔끔한 집이라는 말까지 했다! 이도가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일이 많아져 고생하고 있지만...
하지만 게으름은 할 일은 하지 않은 채 아무런 의욕 없이 마냥 늘어져 있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까끔씩은 게으름을 피우고 싶고 게으름을 즐기지만 정도를 넘어서는 순간 미루어 둔 일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고 더 욱하기 싫어진다. 누군가 충고라도 할라치면 짜증만 난다.
물론 내가 누리고 있는 여유는 공짜로 얻은 것은 아니며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한국에 거주하는 또래의 친구들이 당연히 여기는 그 흔한 자가용이나 아파트도 나는 갖고 있지 않다. 관심이 없어서? 아니다. 어려서부터 자동차를 좋아해서 디자인 공부를 시작한 나이고 디자이너 램프와 가구를 수집하고 있기에 멋진 공간에 대한 갈망도 크다.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손에 넣기 위해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일터에서 보내며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하는지는 상상도 하기 싫다. 아니 그렇게 하더라도 다 가질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다. 욕망은 끝없이 자라나니까. 난 여유로운 삶을 위해 잠시 혹은 오랫동안 그들을 잊기로 했다. 길거리에 세워놓아도 훔쳐가지 않을 만한 자전거나 운치 있는 트램을 타고 다니고 우리 세 식구가 살기에 적당한 크기의 아파트에 월세를 내며 살아가는 대신 난 여유로움을, 한가로움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권리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난 이러한 내 삶에 대체적으로 만족한다.
요즘 한국에서도 아빠들의 육아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물질적인 풍요로움보다는 정신적인 풍요로움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고 들었다. 반가운 소식이다. 아직은 실질적인 관련 정책이나 사회적인 분위기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지만 뭐든지 시도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한국에 가게 되면 아빠 유모차 부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중한 육아휴직을 쟁취해 새 생명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누리고 있는 용감한 아빠들이 조금이라도 더 보이길 기대하며 난 오늘도 이도를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를 어슬렁거린다. 아빠 유모차 부대와 여유로운 눈인사를 나누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