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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Dec 21. 2019

아빠가 되지 마!

2011년 어느 봄날. 가까운 친구이자 네덜란드 출신의 예술가인 베슬 Wessel과 함께 공원에서 병맥주를 마시며 남자들의 잡담으로 한가한 오후를 채워나가고 있었다. 그 날 따라 말수가 적은 친구는 갑자기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넌 아빠가 되지 마!”

“무슨 말이야?”

“아빠가 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거든...”


두 돌이 조금 안 된 아들을 두고 있던 그 친구는 아빠로서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힘들 줄 몰랐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아이가 태어나고부터 바뀐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그 친구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빈 맥주병의 수를 꾸준히 늘려갔지만 사실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단지 ‘그렇겠구나!’하고 넘겨짚는 정도였을 뿐. 확실한 건 그가 아주 많이 힘들어 보였고 난 아직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길어진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넌 아빠가 되지 말라고 말하던 친구의 모습과 2년 전 갓 태어난 아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기뻐하던 친구의 모습이 동시에 아른거렸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웠으며 무엇보다 슬펐다.


그로부터 5년이 넘게 흘렀고 난 아빠가 되어있다. 이도는 베슬이 내게 아빠가 되지 말라고 말했던 당시 그의 아들 또래가 되었고 난 그 친구의 말을 조금씩 공감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나를 ‘아빠’라고 부르던 그 순간의 감동이, 첫걸음마를 지켜보며 환호하던 그 순간의 감동이 일상으로 자연스레 스며들었을 때 즈음 이도는 나를 힘들게 하기 시작했다. 정성스레 유기농 재료로 준비한 이유식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오직 요거트와 바나나만 먹겠다고 떼를 쓰고 이유 없이 짜증을 부리거나 우는 일이 잦아졌다. 내가 아무리 잘해줘도 결국엔 오로지 엄마만 찾는 아들에 대한 서운함은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난 길 잃은 아이처럼 공황 속에 빠졌다. 무엇이 잘못된 건지, 무엇을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 무엇보다 부글부글 끓어 넘치기 직전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덜어내고 다시 이도를 상대해야 하는지... ‘수학의 정석’이나 ‘죽음의 한 연구’를 읽는 것이 차라리 더 편할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탈은 뻔하다. 집을 뛰쳐나가 (마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차가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수밖에... 5년 전과는 반대로 내가 하소연을 하기 위해 친구 베슬을 불러냈다. 그리곤 초보 아빠의 난항에 대해 토로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친구는 마치 내가 그런 말을 할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내게 말했다.


“아빠가 되는 게 쉬운 게 아냐. 너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리는 거니까. 물론 뜻하지 않은 쪽으로 말이지. 가령 우리가 함께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할 시간도 줄어들고 항상 고약한 숙취가 따라오지만 거부할 수 없는 파티와도 이젠 안녕이지. 하지만 아빠만이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즐거움이 있어. 지금은 아직 이도가 너무 어려서 힘들겠지만 그럴 날이 올 거야. 눈 깜짝할 사이에.”

“나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내가 뭘 얼마나 더 잘해야 하는 건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육아에 쏟는 시간이 하루에 한두 시간이냐고. 하루종일을 이도한테 바치는데. 시간뿐만 아니라 그 정성은 또 어떻고. 그렇게 좋아하던 소고기, 연어, 고구마, 당근은 또 왜 갑자기 먹질 않는 건데? 원숭이도 아니고 매일 바나나랑 요거트만 달라고 하니...”

“일단 뭐라도 먹는다는 게 어디야. 아예 아무것도 먹지 않거나 과자만 달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

“그래도 영양분 공급이 중요한 나이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해결이 될 거야. 억지로 먹이려 하면 오히려 더 먹지 않으려 할 거야. 그리고 아이가 엄마 품에서 떠나지 않으려는 건 너무 당연한 거야. 9달 가까이 엄마 뱃속에 있었으니 엄마품이 제일 익숙하고 따뜻하겠지. 엄마 냄새를 맡으면 안정도 되고. 물론 서운하지. 특히 너처럼 많은 시간을 아들과 함께 보내는 아빠한테는 더욱이.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봐. 어느 순간 아들한테 아빠는 우상이 되어버려. 튼튼한 어깨에 자신을 태워 보다 높은 세상을 보여주기도 하고 커다란 자전거로 시원한 바람을 느끼게도 해주니까. 그뿐이 아니지. 남자아이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고 쓴 맛의 맥주도 맛있게 마실 수 있고.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다 알고 있고 못하는 것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빠야. 내 아들이 날 우러러볼 때마다 기분이 정말 좋지만 한편으로는 어깨가 무거워지기도 해. 내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눈여겨보고 그대로 따라 하려 하니까. 하여간 앞으로 2년 정도 지나면 이도는 너의 품으로 옮겨갈 거야. 그때는 반대로 아빠의 품에서 떠나려 하지 않을 테니 그냥 기다려봐.”

“결국 그냥 기다려야 하는 거네. 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기다림에 익숙해지지는 않을 것 같아. 지루하고 지치잖아.”

“그럴 땐 나하고 시원한 맥주 한 잔 하면 되잖아.”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냥 단순하게, 편하게 생각해.”

“우리 한잔 더 하러 갈까?”

“좋~지!”


베슬은 5년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내게 한탄하던 초보 아빠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연륜이 묻어나는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고나 할까? 그렇게 될 날이 내겐 언제쯤 오는 걸까? 맥주잔을 기울이며 또 다른 초보 아빠에게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 보일 수 있는 날이.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한다. 가능하다면 아빠라는 직책에서 잠시 물러나고 싶다는. 무급휴가여도 좋다. 내가 남편이 되기 전, 아빠가 되기 전 그랬던 것처럼 즐겁지만 약간은 외로운 여행이나 갈 수 있도록.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마리와 이도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옆 방에서 들려온다. 보고 싶다. 보러 가야지. 여행은 당분간 미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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