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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May 14. 2020

제발 만지지 마!

베를린 동부역, 오스트반호프 Ostbahnhof 에서 1년에 두 번 열리는 잠러뵈어제 Sammlerbörse 는 600개가 넘는 노점상이 참가하는 베를린에서 규모가 가장 큰, 수집가를 위한 벼룩시장으로 동전, 우표, 책, 귀금속, 그림, 가구 등 다양한 제품을 취급한다. 2011년 5월 어느 일요일. 마리와 함께 따뜻한 햇살 아래 시장 구석구석을 누비고 있던 중 눈에 들어온 테이블 램프 하나가 내 삶을 바꾸어 놓을지는 꿈에도 몰랐다. 가장 널리 알려진 바우하우스 디자인 램프 중의 하나인, 카이저 이델 Kaiser Idell 6556. 특별히 디자이너 조명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유명한 제품이기도 하고 얼마 전 우연히 들른 빈티지 디자인 숍에서 봤던 제품이라 쉽게 내 눈을 사로잡았다. 전문가라도 되느냐 이리저리 살펴보다 가격을 묻곤 흥정을 시도해 본다. 


“혹시 조금 깎아주면 안 될까요?”
“이 램프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런 소리 안 할 텐데.”


그 당시 램프의 가격이 내게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 제품이 빈티지 디자인 숍에서 훨씬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고 있던 터라 무작정 사기로 했다. 돈을 건네자 나이가 지긋한 판매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너덜거리는 비닐봉지에 카이저 이델 램프를 넣어 건네주었다. 이게 웬 횡재인가 싶기도 했지만 혹시 이상이 있는 제품인지 의심도 들어서 아직 반의 반도 돌아보지 못한 벼룩시장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드디어 전구를 끼우고 전원을 켜는 순간. 간결하지만 멋스러운 램프에서 뿜어 나오는 불빛은 새로운 세계로 나를 끌어들였다. 나의 빈티지 디자이너 램프 컬렉션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후로 돈이 생길 때마다 벼룩시장, 인터넷, 빈티지 갤러리, 옥션하우스 등을 전전하며 빈티지 디자이너 램프와 그에 어울리는 가구 등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단순히 물건을 수집하는데 그치지 않고 관련 서적과 인터넷을 뒤져가며 자료조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관련 지식 없이는 컬렉션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깊게 빠져들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지인의 제안으로 컬렉션 대행 및 판매까지 영역을 넓히게 되었다. 몇 년이 흘러서 입소문을 타고 구매를 요청하는 콜렉터들이 점점 늘어날 때 즈음에는 아가방으로 쓰기로 한 방이 내 컬렉션과 콜렉터들이 주문한 제품으로 가득 찼다. 나는 볼 때마다 뿌듯했지만 이도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방을 비워줘야 했기에 아쉽지만 하나둘씩 내 품에서 떠나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이도가 태어나자 내 컬렉션을 사모하던 주변 친구들과 수집가들은 이도가 망가뜨리기 전에 남은 컬렉션도 자신들에게 싸게 넘기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모든 빈티지 디자이너 조명, 가구, 소품들은 눈으로만 감상하는 전시용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사용하며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자 장점이다. 실제로 나의 모든 컬렉션은 집안 곳곳에서 손때를 묻혀가며 사용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전시용에 가까운 의자가 하나 있다. 거실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그분’ 은 몇 년 전 재판매를 목적으로 구매한 고가의 안락의자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덴마크의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인 ‘핀 율 Finn Juhl’ 의 작품이다. 상태나 가격이 너무 좋아서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발견 즉시 충동구매한 제품이었다. 있는 돈 탈탈 털어서! 오스트리아에서 건너온 ‘그분’ 이 우리 집에 도착한 날, 나는 거실 한편에 조심스레 모셔놓고 한참을 감상하다가 용기를 내어 조심스레 앉아보았다. 가죽으로 감싸인 팔걸이에 두 팔을 살포시 얹고 양다리는 살짝 벌린 채. 아프리카의 족장이 된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내가 구매한 브와나 체어 Bwana Chair 1962는 핀 율이 아프리카 원시미술의 영향을 받아 디자인한 제품이다.) 티크원목과 부드러운 가죽이 멋스럽게 어우러진 의자는 보기만 해도 편안하고 탐스럽다. 그래서일까? 이도가 걸음마를 시작하게 되자 틈만 나면 그 의자에 기어올라가려 한다. 온갖 음식물로 더럽혀진 옷을 입고 있건 벌거벗은 채로 있건 상관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손에 쥐고 있던 블록완구로 의자 이 곳 저곳을 마구 긁기도 했다. (같은 제품이 존재하지 않는 빈티지 제품의 특성상 작은 흠집 하나에도 가치가 많이 차이 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도를 번쩍 들어 올려 반대편의 커다란 소파에 옮겨놓지만 이도는 짜증을 부리며 다시 ‘전시용 의자’로 향한다. 그리곤 못마땅한 눈초리로 나를 째려본다. ‘나도 아빠처럼 핀 율 의자에 앉고 싶단 말이야. 왜 자꾸 나를 이케아소파에 앉히려고 하는 거야?’라고 따져 묻듯이. 다시 이도를 소파로 옮겨 놓자 이도는 서럽게 울기 시작한다. 난감하다. 이도를 안고 집 안 곳곳에 걸린, 놓인 램프를 밝히기 시작한다. 각기 다른 빛을 발하는 멋진 램프 하나하나에 이도의 서운함도 곧 수그러든다. 


그러한 이유로 이도가 태어나고부터는 가구보다는 조명을 위주로 수집하고 있다. 조명은 상대적으로 부피가 작고 이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매달아 놓거나 올려놓고 사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현재 90qm 정도 되는 아담한 아파트에 13개의 소장용 램프를 포함 총 18개의 조명이 사용되고 있으며 10개 정도는 박스 안에 모셔져 있다.)

하여간 나의 유일한 ‘전시용 의자’는 부피가 커서 이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모셔두기도 마땅치 않고 구매를 원하는 콜렉터도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아, 가능하다면 계속 소장하고 싶은 마음에 구매자를 찾으려 하지 않아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도는 내 눈치를 살피며 의자 쪽으로 슬금슬금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이도야, 이 의자는 제발 만지지 마! 네가 조금 더 나이가 들면 마음대로 앉게 해 줄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이도는 그저 씨익 웃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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