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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Apr 19. 2020

마마 아빠

마리는 베를린의 한 번역, 통역 회사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데 모국어인 독일어를 비롯하여 대학에서 전공한 불어와 영어에 능통하며 취미?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나 역시 모국어인 한국어, 마리와 나의 공용어인 영어 그리고 일어, 독어를 구사한다. 물론 나의 독어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지만... 여러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여러 문화를 이해하고 포용한다는 것과도 같은 말로 국제적인 도시에서 살아가거나 여행을 다닐 때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언어가 달라서 말이 통하지 않아도 ‘눈 빛’이나 ‘손짓 발짓’을 통해 혹은 눈이 아플 정도로 발전한 스마트폰을 이용해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는 있겠지만 같은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제한적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해외여행을 다니며, 해외생활을 하며 직접 느낀 점이다.


이도가 태어났을 때 우린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나는 이도에게 한국어로만, 마리는 독일어로만 이야기해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아빠와 엄마의 언어를 습득하게 도와주자고.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의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다.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여러 문화를 접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선물인가! 하지만 주변에 외국인 파트너와 결혼(혹은 동거)한 한국인 중에는 아이에게 한국어를 쓰지 않거나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이가 너무 어려서 혼란스러워할 것 같다거나 자기 자신이 한국어로 대화하는데 불편하다거나(교포의 경우) 등등의 이유를 나열하지만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적응과 습득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주변에 부모가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아이들을 보면 너무나 당연하게 두 개의 언어를 구분하여 사용한다. 엄마와는 엄마나라의 언어로 대화를 하고 아빠와는 아빠나라의 언어로 대화를 하고. 물론 어법이나 문법이 올바르지 않거나 발음이 정확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그런 것들은 나중에 학교에 들어가서 배워도 절대로 늦지 않다. 일상생활 속에서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외국어를 접하고 익히고 사용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18개월 된 이도도 나와는 한국 단어로, 마리와는 독일 단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이도에게 나는 ‘아빠’ , 마리는 ‘Mama 마마’인 것이다. 그저 신기할 뿐이다. 처음이 중요하다. 그 시기를 지나면 아이들은 이미 사용하지 않았던 언어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적응하는데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이도에게 한국어로만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이도가 킨더가르텐에 등교(등원?)한 첫날부터 더욱 확고해졌다. 우리 세 식구는 이도가 속한 그룹의 교실에서 보육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다른 아기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나와 마리는 영어로 대화를 했고 마리는 이도에게 독어로, 나는 이도에게 한국어와 독어 단어를 섞어가며 이야기했다. 우리 세 식구를 지켜보던 한 보육사가 잠시 후 내게 다가와 묻는다.


“이도 아빠는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전 한국, 서울에서 왔어요.”

“온지는 얼마나 됐어요? 독일어는 잘하시나요?”

“6년 정도 되는데 부끄럽지만 독어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에요.”

“그러면 지금부터 이도한테 독어는 사용하지 마세요.”

“네?”

“모국어인 한국어만 사용하시고 독어는 더 능숙해지면 사용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어려서부터 잘못된 언어를 접하는 건 좋지 않거든요. 아기들은 부모가 생각하는 것보다 적응과 습득이 빨라서 엄마 아빠가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하지만 엄마가 사용하는 독어와 아빠가 사용하는 불완전한 독어가 다를 경우에는 헷갈려할 수가 있지요. 아기들은 아직 어떤 게 올바른 단어인지, 표현인지를 모르니까요. 만약 아빠의 잘못된 독어를 그대로 습득할 경우엔 고치기도 수고스럽잖아요.”


보육사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지만 그녀의 충고는 내게 단호하게 다가왔다. 한 마디로 나의 어설픈 독어가 이도의 독어 습득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내 모국어인 한국어로만 이야기하라는 소리였다. 맞는 얘기다.


이도처럼 태어나자마자 최소 2개 국어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접하는 것이 결코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프렌츨라우어 베르그에서는. 예를 들어 이도가 속한 킨더가르텐의 그룹을 보면 반 이상이 부모의 국적이 다르거나 부모가 2개 국어 이상을 일상생활에서 구사하는 가정의 아기들이다. 단지 이도가 다니는 킨더가르텐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지역 대부분의 킨더가르텐이 비슷한 상황이며 주변 초등학교의 경우에는 독어와 영어 혹은 독어와 불어 등 2개 국어로 수업을 하는 곳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15년 기준으로 베를린의 인구는 약 352만 명이며 공식적으로 등록된 외국인 거주자는 약 62만 명으로 국적은 무려 190개가 넘는다!) 이렇듯 베를린에서 외국어는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접하고 습득하고 사용하는 것이지 한국에서처럼 큰돈과 시간을 할애하며 쌓아야 할 ‘스펙’이 아닌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당당하게 이도한테 독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언제쯤 올까? 다시 시작해야 한다. 독일어! 곧 다가올 영주권 신청을 위해 멀찌감치 미루어 두었던 독일어 능력시험 준비를 해야 하기도 하고 내가 한심하게 바라보던, 10년 넘게 베를린에 살고 있으면서 독어를 못하는 외국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행 중 만난 한국교포 아저씨의 충고가 귓가를 맴돈다.


“한 귀로 흘려들어도 좋고 늙은이의 쓸데없는 참견이라 생각해도 좋지만 딱 한 가지만 이야기할게. 앞으로 독일에서 계속 살 생각이면 무조건 독어 배워. 그렇지 않으면 당연한 권리도 누리지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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