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직접 운전해서 갈테니 오늘은 강실장은 먼저 퇴근해!"
"네.."
오랜만에 직접 운전을 하는 헨리다.
지영은 사람을 기다리는걸 아주 싫어했다.
빨간색 다이어리 중간 중간에 적어놓은 약속시간의 늦은 사람들에 대한 저주의 메모.
그 저주가 자신에게는 오지 않았으면 했다.
먼저 도착해 지영이를 기다리고 싶었다.
근사한 레스토랑도 예약했다.
신데렐라 마법에 걸린 공주처럼 지영을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기분이 묘한 지영이다.
첫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다. 심장이 두근 거렸다.
이미 헨리와 지영은 함께 밤을 보내기도 했고, 가볍고 진한 키스도 나누었다.
작은 커피숍에서 차를 마셨고 평범한 연인처럼 마트에서 함께 쇼핑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떨린다. 시계를 계속 쳐다보고 있는 지영이다.
"5분 남았다"
지영이는 이미 퇴근 준비를 마친 상태이다.
"이대리님..."
"어? "
"본부장님이 지금 찾으신데요... 지금 당장 본부장실로 오라고 하셨다는데요.."
"뭐?"
"왜? 사보 인터뷰건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다는데요.."
"아니..퇴근 다 되서 ..."
"그러게요.."
"똑똑"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간 지영은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는 명훈 앞에 섰다.
"부르셨어요?"
"네. 사내 인터뷰 때문에... 보자고 했습니다"
"음..뭐가 마음에 안드시나요?"
"다.. "
"네?"
"다 마음에 안들어..다시해...인터뷰도 사진촬영도..."
".................................."
멀뚱이 서있는 지영을 보면 명훈이 말했다.
"늦을것 같은데 저녁 먹을까? 뭐 먹고 싶어? 너 좋아하는 초밥 어때?"
".................................."
명훈의 생각을 알아챈 지영이다. 아마도 입이 가벼운 후배는 여기저기 지영이의 통화 내용을 전했을것이다.
그 이야기는 명훈에게도 들어 갔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데이트가 있는 지영이의 퇴근을 막았다. 명훈은 비서에게 평소 지영이 좋아하는 초밥도시락을 사오라고 부탁했다.
"계속 서 있을꺼야?"
"............................."
"앉아.. 초밥 올때까지 할이야기가 많아.."
지영이의 전화벨이 울렸다. 헨리였다.
주저없이 전화를 받는 지영이였다.
"헨리... 야근해야 할 것 같아요.. 조금만 기다려 줄래요? 금방 갈께요..저녁요? 집에서 먹어요...네..."
지영이의 통화에 명훈이 벌떡 일어나 지영이 전화기를 뺏어 집어 던졌다.
"뭐하는 짓이야?"
"너야말로 뭐하는짓이야. 도발하지마..앉아"
변했다.
명훈이 변했다.
눈빛도 행동도......
부드럽고 자상하기만 하던 가끔은 때를 부리던 명훈이 아니였다.
의자에 강압적으로 지영을 앉치고는 명훈이 말했다.
"초밥 먹고 인터뷰하고 천천히 있다가 내가 혜진의 집에 데려다 줄께..도발하지마. 난 너 안보내..헨리? 그 남자따윈 난 몰라..나 이제 이기적으로 살꺼야. 넌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내꺼야"
정막이 흘렸다.
"오빠... 나 오늘은 그냥 갈테니.. 오빠도 나도 진정하고 이야기 하자. 더이상 인터뷰같은건 의미없잖아. 어차피 나랑 헨리랑 만나는걸 방해 하려고 한거라면 소용없어..어차피 나 그 사람 집에 있으니깐...."
"나와...당장...오늘부터....우선 내가 호텔 잡아줄께..."
"그러지마...왜 이래...진짜?"
"너야 말로 왜이래..."
명훈이 지영을 잡고 흔들면서 소리를 쳤다.
지영의 팔을 잡고 있는 명훈의 손을 살며시 풀고는 그냥 초점없는 멍한 눈으로 명훈을 바라봤다.
"오빠..이건 아니야...........오빠.. 멈춰...움직이지마. "
".............................."
그리고는 조용히 뒤돌아 지영은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 지영을 잡으려는 명훈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또 지영이의 주문에 걸렸다.
항상 지영은 자신에게 말도 안되는 주문과 체면을 걸었다.
"이제 우리 그만 싸우자"
그렇게 말하면 싸우다가도 이내 싸움을 멈췄다.
힘들고 지쳐있는 자신에게 주문을 걸어주고 체면을 걸었다.
그럼 정말로 지영의 말처럼되는 기분이였다.
그리고 "멈춰...움직이지마" 라는 주문에 다리를 움직일수도 목소리를 낼수도 없었다.
지영에게 무슨일이 생긴것 같아 걱정인 헨리였다.
통화 중간 전화가 꺼졌고, 그 뒤로는 통화 수화음만 들리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안절부절 못하던 헨리는 결국 차에서 나와 지영의 회사 앞을 들어가지는 못하고 그냥 서성이기만 했다.
그때 멀리서 지영이 풀이 죽은 표정으로 나오는것이 보였다.
뛰어오는 헨리를 보고 지영이 말했다.
"당신도 멈춰요..."
지영이의 말에 순간 멈춰서는 헨리였다. 지영이도 멈춰있다.
1미터 조금 안되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자신의 발에 아주 무거운 돌이 얹쳐 있는 기분이였다.
지영이의 "멈춰요"라는 한 마디에 온몸의 세포들이
멈춰버렸다.
마법 같았다.
지영과 헨리는 서로를 바라 만 보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헨리가 온 힘을 다해 몸을 움직이는 듯 했다.
"기다려. 움직이지마.. 내가 갈께..."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 헨리가 말했다.
한걸음 한걸음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헨리가 조심 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성큼성큼...
지영을 와락 안았다.
"나는 멈추지 않아. 너에게 계속 갈꺼야..."
"............................"
"나름 첫 데이트였는데.. 오늘은 기분 전환으로 다른곳에 갈까?"
"아니요..난 헨리집이 편해요..."
"헨리집 아니고..우리집..."
"네..우리집으로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