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통해 내 안의 어른 아이를 만났다.
육아를 하다 보면 나라는 인간이 어디까지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아이가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도 유난히 핀트가 나간 사람처럼 화난 감정을 쏟아낼 때가 있다. 아주 잠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찰나에 욱하게 된다. 머리로는 아이의 행동이 이해되지만 마음은 성난 해일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린다. 이렇게 따로 노는 감정은 육아로 인해 신체가 지칠 때면 여과 없이 드러난다. 그리고 전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담아 아이를 꼭 안아주고 나서야 끝이 난다. 이 바보 같은 일은 둘째가 태어나고 글쓰기를 시작하고 난 뒤 멈출 수 있었다.
아이가 잘못하면 유난히 과하게 반응할 때가 있는데 종종 '아....... 나 왜 이러지. 어렸을 때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엄마의 모습인데. 우리 아이도 그때의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으면 어쩌지' 등등 불안감이 들 때가 있다. 글쓰기 전에는 최대한 수습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아이에게 온갖 해명을 늘어놨었는데 그런 행동의 원인을 찾은 뒤에는 바보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
욱하는 상황과 마주하면 잠시 멈추고 아이를 바라본다. 그리고 먼저 내 마음을 살펴본 후 아이를 다독인다. 몸으로는 아이를 안아주면서 마음으로는 나를 안아주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계기는 글쓰기에서 시작되었다.
둘째가 태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어느 날 아기띠로 아기를 안아 재우며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도넛님의 블로그를 봤다. '온라인 100일 글쓰기'를 시작한다는 글을 보자마자 '어. 지금처럼 아이 재울 때 폰으로 글 쓰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바로 숭례문 학당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었나? 지금 생각해보면 4살인 큰 아이와 태어난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아 빽빽 울어대는 둘째 독박 육아를 하면서 무언가를 한다는 게 정신 나간 일 같지만 그때는 '잠 자기 전에 쓰면 되지.'라는 아주 단순한 생각으로 신청했다.
당연히 매일 쓰지 못했다. 아이를 재우려다가 먼저 잠들기가 일쑤였고 쓸 에너지가 없었다. 그러나 더 큰 장애물은 다른 데에 있었다. 글을 써야 하는 데 뭘 써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아이 키우는 전업주부라 집, 놀이터, 큰 아이 어린이집이 행동반경의 전부이니 쓸 말이 없었다. 아이들의 일상을 관찰해서 쓰는 것도 한두 번이지 뭘 써야 할지 내내 고민하다가 글의 소재를 찾지 못해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컴퓨터를 끈 날이 여러 날이었다. 밀린 숙제처럼 쌓이기 시작한 글쓰기 부담감은 점점 무거워졌고 내 머릿속은 글의 소재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아이들 등쌀에 사색에 잠길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날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잠투정하는 둘째를 달래 가며 큰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날이었다. 날씨가 좀 풀려서 잠들락 말락 하는 둘째를 위해 유모차를 밀며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차가 다니지 않아 조용한 길가. 봄바람에 나기 시작한 푸른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문득 어릴 때 내가 불편했던 감정이 떠올랐다. 꼭 어제 본 영화 장면처럼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라는 궁금증을 품기 시작하더니 그 당시의 나로 돌아가 하고 싶었던 말 또는 이렇게 하면 어땠을까 싶었던 말들을 무대 위 배우처럼 머릿속에서 원맨쇼를 하기 시작했다. 그냥 자연스럽게 나를 들여다보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때의 나로 돌아가 유체 이탈한 것처럼 삼자의 시점에서 '나를' 관찰했다.
왜 그때 그런 말을 했는지, 상대방의 말에 왜 답을 못했는지 등 그때를 생각하며 여러 각도로 분석해봤다. 그러다 문득 '아. 저 때 해소되지 못한 감정이 내 안에 쌓여있구나. 그래서 내가 불편한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과 신랑이 하는 행동 중 유독 나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들이 있는데 그건 걸러지지 못한 불순물처럼 쌓인 어릴 적 아픈 감정과 연결된 기억들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다.
어른으로 성장한 몸과 달리 자라지 못한 마음은 어딘가 빗장을 걸어 잠그고 내 안 깊숙이 숨어있었다. 내가 힘들어하는 감정들이 내 안의 어른 아이임을 깨닫고는 그 아이를 달래는 작업에 들어갔다. 모서리처럼 튀어나 온 기억들을 글에 풀어낼 때마다 숨어있던 어린아이의 모습을 아주 조금씩 찾아냈고 전지적 작가 시점의 영화처럼 바깥에서 그 상황들을 바라보며 어릴 적 나에게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다독여줬다.
이 과정을 일 년 간 반복했고 나는 숨통이 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