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로다움 May 13. 2022

진짜 82년생의 고백

전업 육아맘이 되었을 때 나를 가장 괴롭게 한 생각

  몇 년 전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당시 독서 수업을 함께 했던 선생님들과 이 책으로 서평을 쓴 적이 있. '맘충'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의 인터뷰를 함께 읽고 각자의 생각을 나눴는데 참여자가 모두 여자인 만큼 이 소설에 크게 동감했었다. 다만 연령대에 따른 공감의 차이가 있었다. 70년대에 태어나신 분들은 소설 속 주인공의 고백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느껴졌다고 한 반면 가장 막내였던 82년생인 나와 다른 한 분은 '저희 때랑 조금 다른 것 같아요.'라고 답했던 일이 떠오른다. 중, 고등학교 때 신체를 터치하는 변태 같은 선생님이 계셨지만 신체검사 때 노골적으로 옷을 올리는 선생님은 없었다. 읽으면서 '이건 좀 과한대?'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을 말씀드렸더니 다른 선생님들께서는 자신의 학창 시절 또는 사회 시절에는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났다고 말씀하셨다. 그날 결론은 '남편의 입장'이 지나치게 축소되었다는 것과 제목을 '82년생 김지영'이 아닌 '75년생 김지영'이 맞는 것 같다고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  


82년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소설 주인공 '김지영'처럼 비슷한 길을 걸어온 듯하다. 남녀공학이지만 남녀 합반이 아닌 중학교, 여고를 졸업한 탓에 남녀차별보다는 '사당오락'을 들으며 공부만 강요당했고 다행히 운 좋게 원하는 과에 진학해 4년 동안 열심히 대학 생활을 즐겼다. 사회인이 되어서는 힘들어도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살았고 회식 때 막내뻘인 내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맞고 상사가 '여자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거지 같은 말에도 속으로는 욕하면서 고개 끄덕이며 동조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내가 생각보다 더 멍청하게 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학 신입생 때 동기 오빠로부터 너는 '미스 갤러리아'에 뽑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나를 포함한 신입생들 미모를 '미스코리아'처럼 순위를 매겼다는 것이다. 그때 당시 우습게도 그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했던 것 같다. 30명이 넘는 여학생들 중 외모가 상위권이라는 남자들의 평가에 어깨가 으쓱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머저리 같았다. 그들이 뭔데 나의 외모를 판단하고 순위를 매기도록 두었을까? '당신들이 뭔데 나를 평가해? 남자 외모 순위도 매겼어?'라고 따졌어야 했다. 물론 나도 친구들과 남자 선배들의 외모에 대해 말한 적은 있다. 하지만 '어떤 선배가 멋지더라, 내 스타일이야. 00선배보다 00선배가 더 잘생겼지.'등 개인적인 소감이었지 순위를 매기지는 않았다.(갑자기  나를 불편하게 만들던 아이돌 경연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회사 다닐 때도 남자 팀장이나 팀원이랑 있을 때면 늘 쓸데없는 말을 던지는 남자 상사의 불편한 농담들을 받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뭐가 차별이고 잘못된 것인지 몰랐던 나는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깨달았다. 내가 참 무지했다는 것을.


자라면서 엄마에게 자주 들었던 말 중 하나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라.'였다. 아들 하나에 딸 다섯인 집에서 장녀로 자라 주방 근처에 오지도 않는 가부장적인 신랑을 만났던 엄마는 '넌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라는 말을 주문처럼 전했다. 다니고 싶은 학원이 있다면 얼마가 되었든 엄마는 보내줬고 연극영화과에 가겠다고 했을 때도 단번에 특기 학원을 함께 알아봐 주며 나를 지원해줬다. 대학 졸업 후 회사에 새벽같이 출근하는 나를 보면서도 '열심히 일해. 엄마처럼 살지 말고 훨훨 날아가.'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대학교 때도 회사에서도 '독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내 일에 적극적이었다. 스스로 주말까지 반납하며 일에 진심이었던 나는 아이를 출산하면서 '경력 단절'이라는 단어와 함께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출산 휴가 낸 지 일주일 만에 회사에서 구조 조정을 핑계로 해고된 탓에 자연스럽게 육아는 내 몫이 되었다. 당시 '아기는 엄마가 키워야지.'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고 나 역시 당연하게 여겼기에 '아이 돌 때까지는 육아에 전념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육아가 어디 내 맘처럼 되나. 껌딱지인 딸을 떼어놓고 취업 준비를 하니 아이는 왜 이렇게 자주 아픈지. 이런 아이를 어떻게 남의 손에 맡기나 하면서 다니기 시작했던 어린이 집을 그만뒀다. 그렇게 '올해까지만 아이를 위해 살자.'했던 것이 둘째 4살이 될 때까지 총 7년을 전업 주부로써 살았다.


태어난 지 한 달 된 둘째를 물려받은 포대기로 업고 나선 큰  딸 어린이집 등원 길. 마침 출근하던 어린이 집 친구 엄마를 만나 인사했는데 당시 장면이 잊히지가 않는다. 언제 신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굽이 있는 구두에 추운 날씨에도 정갈한 코트를 입고 뽀얗게 화장까지 완벽했던 그 엄마의 실루엣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다. 당시 내 모습은 처참했다. 둘째 임신 후 생긴 성인 아토피로 얼굴은 진물이 날만큼 좋지 않았고 나보다 아이 둘을 챙기는 게 더 중요했던 터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인사만 하고 가볍게 지나갔던 그 찰나에 진심으로 내가 부끄러웠다. 창피했다. 예전의 나도 저렇게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출근했는데 아이 둘을 키우는 전업 주부가 된 나는 쓸모없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날 밤 지친 기색으로 퇴근 한 남편이 부러워 샘이 났다. 애 둘을 낳고 키우는 동안 나는 '경력 단절'이라는 단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남편은 그동안 팀장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둘째 출산 예정 일 2전에 회사에서 헤드 역할을 하는 부서로 배치되면서 승진까지 했던 신랑은 더없이 바빠져 두 아이의 육아는 고스란히 내 몫이 되었다.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면서도 돈 한 푼 못 받고 인정도 받지 못하는 나와 달리 신랑은 회사에서 힘든 만큼 '급여'와 '인정'으로 보상받았다. 똑같이 힘들게 사는데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퇴화되어 무쓸모 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도 신랑과 똑같이 대학교까지 나와 회사 생활하며 열심히 20대를 살았는데 왜  난 더 자라지 못했을까? 그 어떤 일보다 전문적이어야 하는 육아가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것처럼  취급받는 것이 싫었는데 몇 년을 멈춘 채 아이가 중심이 되는 삶을 직접 살아보니  남는 것은 점점 사라져가는 '나'였다. 그 상실감이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엄마'처럼 살지 말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너의' 능력을 펼치는 인생'을 살라고 말씀하시던 엄마의 노력까지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딸이 된 것 같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자유롭게 너 하고 싶은 일'하면서 살라는 엄마도 28살부터 결혼하라고 채근했으며 결혼하고  아이를 낳자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작가의 이전글 대화가 사라지는 맞벌이 부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