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명동성당에 다녀왔다. 어머니와 걸어서 종로의 많은 사람들을 지나 시간에 맞춰서 도착했다. 미사는 늘 엄숙했다.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을 맞이해서 노동과 관련한 약자에 대한 강론을 들었다. 미사가 끝나고, 잠시 성당 마당의 풍경을 봤다. 성당 마당의 풍경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평온함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영화 '트로이'를 봤다. 트로이 전쟁으로 신과 영웅이 자신의 한계를 넘나는 드는 장면이 나온다. 상대방과 치열하게 싸우기도 하고, 평화의 협정을 갖기도 하며, 그 계약을 파괴하기도 한다. 신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함은 아닌지도 모른다. 나는 나 자신과 싸운 적이 있다. 나의 한계를 넘나 들고 어디까지 가나 싶지만, 그 한계를 넘지 못한다.
가령,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체대입시 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실기점수가 있는데, 그 점수에 맞춰서 자신의 한계를 넘고 기록을 세우면 된다. 운동을 해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는데, 난 그때 다 되는 줄 알았다. 물론 나 자신을 던지고 또 던지다 보면 되겠지만, 타고난 사람에게는 이길 수가 없다. 사실 경쟁만 아니면, 그렇게 무리하게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그렇게 몸을 혹사시키며 운동하는 것보다 공부를 하라는 선생의 말이 더 합리적 인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 성당 철탑의 십자가모양과 하늘과 구름이 아름다웠다. 사진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치열하다. 버스를 타고 왔는데, 젊은 여성이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나를 밀치면서 그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 잠자는 여성을 툭툭 치면서 잠에서 안 깨니 한 번 더 툭툭 치면서 "학생 자리 좀 양보해"라고 했더니, 그 젊은 여성은 비몽사몽 "예?" "자리 좀 양보하라고" "아 예예"하고 일어나 비켰다. 그 할머니는 같이 온 사람을 부르더니 내 앞에 캐리어를 끌고 자리를 차지했다.
그 젊은 여성 앞에는 또 다른 젊은 여성이 있었는데, 편안하게 핸드폰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에어컨은 켜져 있었고, 그 여성은 연신 입을 막지 않은 채 기침을 하고 있었다. 나이 든 분이 그 앞에서 계셨는데,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난 그 모든 광경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배려와 양보가 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부끄럽지만 그런 적이 있다. 나만 생각하고 옆 사람의 기분은 생각하지 못하고 살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또 상대방을 위해서라도 적당함을 유지한다면, 사실 어떤 자신의 한계를 넘지도 않아도 되고 자신과 상대방과 싸울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