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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 제이 Dec 03. 2019

대학신문기자에서 외항사의 기장이 되기까지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신 단 한 분의 교수님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이미 오래전부터 듣고 있었다.

"제는 어쩌려고 저려는 거야? 아직까지 군대도 안 가고?  대학 졸업을 먼저 하고 군대에 간다고? 전혀 미래에 대한 생각이라는 것이 없군!"

설상가상으로 나의 뒤를 이어 다음 해에 편집장을 해야 할 2학년 후배들은 하나같이,

"편집장님 뒤를 이어 3학년에도 신문사에 남을 생각은 없습니다. 저도 저의 앞길을 생각해야죠."


맞는 말이었다. 나라고 확신이 있었겠는가? 무슨 거창한 계획을 가지고 신문사에 남았던 것은 아니었다. 신문사를 떠나는 후배들이 나를 정확히 본 것일 수도 있다. 후배들의 눈에는 어쩌면 나는 이기적이지 못해서 3년 내내 신문사를 떠나지 못했던 우유부단한 선배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학 1학년 때 영자신문사 기자들과  함께. 오른쪽 맨 아래가 본인입니다. 1989년.


대부분 동기들이 이러저러한 핑계로 신문사를 떠난 이후에도 자그마치 3년간이나 대학 영자신문사에서 여자 동기생과 단둘이 남아 묵묵히 신문을 거르지 않고 발행했다.



그리고 마주했던 피할 수 없었던 마지막 1년, 대학 4학년.


이임식을 끝으로 나의 자리를 내어주고는 그렇게 홀로 캠퍼스에 나섰던 어느 봄날이었다.


그해 필리핀에서 열릴 예정인 국제학생회의에 파견할 학생대표를 선발한다는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무턱대고 지원을 했다. 나의 가치를 누군가에게 증명받고 싶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나의 이름을 다른 두 명의 합격자 명단과 함께 대학본부 게시판에서 발견했다. 그 당시 나의 학점은 3.5.  내세울 것이라고는 영자신문사 편집장을 했었다는 것 단 하나였다.  


교환학생으로 미국에서 공부했던 영어 발음이 훌륭했던 여학생과, 다른 한 명은 입학 당시 전체수석에 그때까지 학점 평균이 4.5를 유지하던 천재였다.

 

그해 마닐라에서 같이 참석해 나의 주제발표를 들었던 총장님께서 회의를 마치시고 흡족해하셨다는 말을 귀국 후에야 들었다. 대학신문사 기자였던 내가 왜 선발이 되었는지 그제야 알았다. 3년간의 기자 생활을 거치며 어느새 나는 외국인들 앞에서 주눅 들거나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인지 졸업을 앞둔 겨울 어느 날 교수님께서 나를 연구실로 불러주셨다.  

그런데 이분이 나를 앞에 앉혀두고는 물어보신 질문이 다소 의외였다.


"자네의 영어 회화실력은 아주 훌륭해. 해외에서 생활을 하지 않고 그 정도의 실력을 키운 건 대단한 일이야. 그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그래. 지난 4년 동안 어떻게 영어를 공부했는지 알려주지 않겠어?"

한참을 나의 이야기를 귀를 기울이며 들으시던 교수님의 얼굴에  어느 순간 갑자기 아쉬운 표정이 스치는가 싶더니,

공군의 T37 중등 비행훈련 중에 촬영 1994년


"이제 공군 조종사 교육에 들어간다고 들었어. 축하해. 하지만 나는 무척 아쉽다.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의 입장에서 자네가 지금껏 쌓아온 영어실력이 더 이상 나아질 기회를 잃게 되어 안타까워. 자네의 영어는 여기까지 인 거야. 군대에 가서도 지금의 영어실력을 유지라도 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해. 틈틈이 시간을 내어서 꼭 영어공부를 계속하길 바래!"


이 말씀을 해주신 해가 1992년 이맘때 겨울이었다. 나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알아보시고 애정 어린 조언을 해주신 27년 전 교수님의 조언을 그 이후 평생 잊지 못했다.




며칠 전 그 교수님을 27년 만에 대학교 교정에서 다시 마주했다. 계절도 다시 그 겨울이다. 나는 어느덧 중년이 되었고 내가 사랑했던 캠퍼스의 메타세콰이어는 그사이 허리가 굵어지고 키가 더 자라 있었다.


대학을 떠난 뒤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되돌아보니, 학생의 잠재력을 발견하신 교육자로서의 교수님의 눈은 정확했지만, 앞으로 그 학생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미쳐 예상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공군에 들어간 나는 복무하는 내내 오히려 대학 때보다 더 깊은 영어의 늪에 빠져 살아야 했다. 미군과의 연합작전에는 늘 나의 자리가 있었고 온갖 작전과 비행 관련한 영문원서의 번역은 주말에도 쉬지 않고 밀려들었다. 거절 못하는 성격은 군대에서도 여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나의 영어실력이 오히려 세월이 흘러가면서 늘어갔다.

보잉777 조종석에서 촬영



대한항공에서 8년간의 부기장 생활에서도 교수님의 예상과는 달리 나는 영어를 끼고 살수 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다. 마치 외국인 회사에 취업한 것처럼 부서원의 절반이 외국인 기장인 곳에서 3년간 지상근무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학생 시절 그렇게 소망하던 한국을 벗어나 마침내 외항사의 기장이 된 제자가 찾아왔으니 스승이 어찌 기쁘지 않으셨겠는가?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한 청년의 가능성을 발견해 주신 교수님. 그리고 교수님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간 삶을 살아온 제자의 만남이라 더욱 특별했으리라.

 

 

놀랍게도 교수님은 그 당시 나와의 인터뷰를 여전히 기억하고 계셨다.

"난 자네의 눈 속에서 자신감을 보았어. 무엇을 하더라도 잘 해낼 것이라는 걸 알아보았지. 여전히 20대 그날 학생 때와 똑같구나."

감사합니다. 김남순 교수님. 지난시절 늘 힘들 때마다 교수님이 제게 주셨던 믿음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김남순 교수님과 한남대학교 교정에서 27년 만의 재회.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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