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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 제이 Nov 20. 2019

KT-1 웅비 시험비행조종사

이진호 시험비행조종사와 관련된 일화

시험비행조종사와 엔지니어

촬영이 잠시 중단되었다. 진행자의 질문에 답을 하던 한영명 박사가 목이 메어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곧 같이 참석한 그의 동료들이 다가가 달래 보지만, 그의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 70을 넘긴 노 과학자는 자신도 어쩌지 못한 채 그저 눈물만 훔쳐내고 있다.

한영명 박사는 1990년대 약 10년여에 걸친 KT-1 개발사업에서 항공기 체계 부장을 역임한 대한민국 항공기 개발의 최고 엔지니어 중 한 사람이다.

“저는 처음엔 시험비행 조종사의 실수일 거라 정말 이기적으로 생각해 버렸습니다”

이 말을 하는 지금 그는 연신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막아내기에 급급하다.

“조사 결과를 보고, 저 자신이 대한민국 최고의 시행 비행조종사를 죽일 뻔했다는 죄책감과 KT-1항 공기 개발 사업 전체를 망칠 뻔했다는 자책감에 너무 괴로웠고 그래서 그 당시에 사표까지 제출했었습니다.”

“사고 조사 중 시행 비행 조종사 이소령은 일체의 변명도 개발자를 비난하는 강변도 하지 않고 담담히 객관적 사실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전 이분의 인품에 감명을 받았고, 그 이후 더욱더, 개발자인 저의 오만으로 이 분을 죽일 뻔했다는 자책에 오랜 기간 힘들었습니다.”

[국방 TV 와의 인터뷰에서 보인 이 남자의 눈물이 이렇게 멋있을 수 있다니!
이래서 나는 대한민국 공군의 시험비행조종사, 항공우주연구소, 국방과학연구소 엔지니어들을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1990년 10월 21일 오전 1130분경 지리산 상공 고도 1만 피트

대한민국 공군 소속 시험비행조종사 이진호 소령이 KT-1 시제 04호기의 시험비행을 홀로 진행 중이다.

점검할 항목은 수평비행상태에서 고도계와 속도계의 정확성 평가를 하는 난도가 높지 않은 항목으로 다른 시험비행 정비사나 조종사 동반 없이 이 2인승 단발 터보프롭 훈련기에 그만 혼자 탑승한 채 점검을 마치고 RTB(귀환)를 하려던 순간에 문제가 발생한다.


펑-

그리고 뒤이어 천둥처럼 그의 귀를 때리는 세찬 바람소리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그를 덮친 충격파에 그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엔진이 폭발한 것인지, 기체가 분해된 것인지 분간할 순 없지만 그는 지금 호흡이 막혀 숨을 쉴 수가 없고, 그의 눈도 실명이 된 것인지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에 순간적으로 조종간과 THROTTLE LEVER를 잡았던 그의 두 손이 어느 사이인가 벌써 사출좌석 양옆의 EJECTION LEVER를 더듬고 있다.

그러다 이내 무슨 생각에서인지 다시 조종간을 잡았다가, 다시 사출좌석 레버에 손을 얹기를 수차례, 그는 지금 갈등하고 있다.

이제, 시속 420Km의 바람이 그의 얼굴과 상체를 거세게 두드리고 있다. 산소마스크와 헬멧의 바이저 틈 사이로 거칠게 비집고 들어온 거센 바람이 얼굴 살갗을 사납게 밀어 올려 그는 지금 눈을 뜰 수 조차 없다. KTX보다 빠른 속도의 풍압이 지금 시험비행조종사의 폐를 마구 눌러 찌그러 뜨리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그의 폐 안에는 더 이상 산소를 들이마실 공간이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소령은,

그의 애기(사랑하는 항공기)를 살리기로 결심한다.

흐릿해진 의식과 더불어 시각마저 상실된 상태에서, 그는 단지 몸에 느껴지는 G FORCE 만에 의지해 한동안 조종을 시도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의 의식이 서서히 안정을 찾기 시작하며, 그는 이내 자세를 낮추어 시속 470KM 맞바람에 노출된 상반신을 조종석 계기 아래쪽으로 구부려 밀어 넣고는, 곧이어 좌석에 장착된 전동 상하 좌석 조절기를 눌러 최대로 아래로 좌석을 낮춘다.

동시에 그는 THROTTLE LEVER를 최대한 줄여 속도를 120 나트까지 줄이는 데 성공한다.

그의 몸이 바람을 피할 공간으로 낮추어짐과 동시에 줄어든 풍압으로 인해 호흡이 그제야 정상으로 돌아온다.

그가 고개를 서서히 들어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을 견디며 조종석 안과 밖을 살펴본다.

산산조각 난 캐노피 조각이 조종석 사방에 어지럽게 널려있다. 머리 위에 있어야 할 캐노피는 온데간데없고 지탱하여 주던 금속 프레임만 그의 머리 위에 날카롭게 잘려 그의 정수리를 향한 채 마치 창끝처럼 그를 조준하고 있다.

‘아~ 내가 탈출을 시도하려 손을 탈출 레버에 얹을 때마다, 어둠 속에서 떠오르던 그 환영이 바로 저것 때문이었구나’

그가 마주친 그 찰나의 환영 속에서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대전 국립묘지, 그의 묘비 앞에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가 만약 의식이 혼미해져 있던 폭발 직후에 본능적으로 사출을 감행했다면 그의 몸은 조종석 상단에 구부러진 채 그를 향하고 있던 날카롭게 잘라나간 금속 지지대에 찢겨나가 곧바로 사망했을 것이다.

이후 사고조사 중 분석한 DATA에 의하면 그는 사고 직후 40도까지 깊어진 KT-1항 공기를 오랜 전투조종사 생활에서 터득한 감각에만 오로지 의지해,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임에도 10도 DIVE상태까지 회복시켰다. 그가 이날 도달한 최저 고도는 7000피트. 인근에 위치한 지리산 정상 고도가 6300피트였다.

시험비행 조종사 이진호 소령은 이날 캐노피가 탈락되고 그 파편으로 동체 여러 곳이 손상된 KT-1 시제 04호기를 안전하게 사천기지에 비상 착륙시켰다. 그날 저녁 사고소식을 듣고 급히 모여든 동료들이 이후 전한 바에 따르면, 그의 눈가는 거친 바람에 짓눌려 검게 멍이 들어있었다.

그는 훗날 인터뷰에서 말한다.

“저는 KT-1 웅비의 개발시험비행조종사입니다. 엔지니어들이 만들어 놓은 시제 항공기의 불확실성을 시제기를 직접 몰고 올라가서 해소해야 하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다. KT-1 04호기 시험비행 중 발생한 캐노피 탈락 사고는 오히려 우리 팀이 운이 아주 좋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시험비행 중 이 문제가 발견되지 않고, KT-1 개발사업이 성공적으로 종료된 이후 일선 훈련 비행대대에서 그것도 조종학생의 SOLO비행 중 발생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시험비행조종사로서 LOSS OF CANOPY라는 분야를 미리 대비하고 준비했던 저에게 이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은 항공기 개발사에서 우리에게 운이 따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고가 있기 전 KT-1 개발사업은 이미 1차 좌초 위기를 맞고 있었다. 개발 엔지니어의 실수가 아닌 도입한 사출좌석 자체의 결함으로 시제 1호기가 추락하고 시험비행조종사들이 부상을 당한 사고로 개발사업은 일차 위기를 간신히 극복하고 다시 시험비행이 재개된 지 채 1년도 지나기 전에 다시 발생한 사고였다.

게다가, 그 사고의 시기가 1990년 서울 에어쇼 기간 중이었기에 그 파장은 감히 짐작하지 못할 만큼 컸다.

한 시험비행 조종사의 현명하고 용기 있는 판단이 대한민국 항공기 개발의 좌초를 막았고 그와 엔지니어들의 헌신적 노력이 결실을 맺어 KT-1 개발은 마침내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이후 대한민국은 이를 통해 축적된 인적자원과 실험시설, 개발경험을 바탕으로 T-50을 거쳐 KFX 사업까지 이어지는 경쟁력 있는 국제 항공기 개발 국가의 하나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 스토리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국방과학 연구소 소속 시험비행조종사 이진호 예비역 공군 중령입니다. 이 사고 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국방과학연구소 소속의 연구원으로 근무를 하며 대한민국 항공기 개발의 주역으로 여전히 헌신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KT-1 개발에 몸 담으셨던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존경과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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