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출신 조종사의 비행 공부
오래전 에미리트 입사 인터뷰에 참석한 첫날 초청을 받아 온 조종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절반 정도가 영국이나 아이랜드계 그리고 나머지 절반이 그 외의 유럽 그리고 남아공 미국 캐나다 이런 나라 순이었다. 아시아계는 총 40명 중에 나를 비롯해 타이와 말레이시아에서 온 단 세명뿐이었다.
이중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Day1에서 비행시간을 확인을 받던 타이에서 온 젊은 777 부기장이 일찍 짐을 싸 방콕으로 돌아가고 말레이 부기장과 나만 남아서 다음날 Day2로 넘어갔다.
이날 컴퍼스 테스트 Compass Test라고 불리는 필기시험에 들어가기에 앞서 시험장 복도에서 대기하던 중에 나보다 나이가 서너 살은 많아 보이는 이 친구를 다시 만났다. 그는 뭔가를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더니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읽고 있었다.
그의 곁에 가서 슬쩍 곁눈질을 해보니 누군가 만들어놓은 조잡한 시험문제지였다.
"그건 뭐죠?"
"아 이건 그간 에미리트에 시험을 보고 왔던 우리 회사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려 만들어 둔 자룐데요, 한번 보실래요?"
이제 시험이 10분도 안 남은 상황에서 별 도움이 안 될 것을 알아서인지 그가 순순히 내게 금방 자신이 읽던 서류 뭉텅이 중에 하나를 건넸다.
항공역학과 비행 규정에 대한 것이었는데 몇 개 문제를 보다가 벌써 동그라미가 쳐져있던 것 중에 내 생각에 답이 아닌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문제 정답은 이게 아닌데요?"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그가 쓰윽 바라보더니
"그래도 안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요. 그럼 그 문제의 답은 뭐죠?"
그에게 정답을 알려주고는 더 이상 그 부산하게 인쇄된 서류뭉치에 관심을 잃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런 류의 자료를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삼국지'라고 부른다. 출처도 정답도 보증할 수 없는 비공식 시험자료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조종사들이 이런 삼국지를 몇 권을 프린트하거나 선배에게서 넘겨받아 공부를 하고는 사업용과 운송용 면장 시험을 보러 들어갔다. 그러고도 대부분 시험에 통과했다.
그 안에 틀린 답보다는 시험에 통과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정답이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지금은 그나마 많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듣는다.
내가 이렇게 남의 일인 양 얘기를 하는 이유는 나 자신 삼국지를 공부해서 사업용과 운송용 면장 시험을 치러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운송용 면장을 미국 애리조나에서 따고 돌아와 한국 라이슨스로 전환한 당시로서는 드문 케이스였다.
공군에서 전역하기 전 전수 과정을 거치면서도 처음부터 삼국지와는 철저히 담을 쌓고 지냈다.
뭘 알고 그랬다기보다는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 시험을 통과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닌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픈 마음이 컸다.
공군 비행훈련을 받으며 늘 부러웠던 사람들이 항공대학교 ROTC 동기생들이었다. 제대로 대학에서 전공과목으로 공부해 탄탄하게 실력을 쌓은 이들의 존재는 문과 출신 조종사인 내게 비행 생활 내내 큰 자극이 되었다.
삼국지 공부의 단점은 잘 알다시피 '휘발성' 메모리라는 점이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날아가 버릴 가능성이 99%다. 시간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더불어 한글로 시험공부를 했을 때의 단점은 비록 지식이 이해가 되었더라도 그 지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단절된다는 점이다. 결국 항공의 모든 최신 자료는 영문이다.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조종사로서 엄청난 어드벤티지다. 단위 시간당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에 차이가 날수 밖에 없다.
결론을 맺자면,
하나. 절대로 어느 분야든 시험공부를 위해 삼국지를 거들떠보지 마시라.
둘. 항공은 영어로 공부를 해야 하고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시험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기억이 오래 유지되고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살아있는 지식이 된다.
내가 글을 쓰면서 굳이 영어단어를 먼저 언급하고 한글로 해석을 올리는 이유도 독자들의 지식이 한글 안에만 고착되어서 확장성을 잃을까 우려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