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여러분들 모두 조종사가 맞긴 한가요?"
앞서 가던 동료들이 이미그레이션에 다다르는 것이 보였다. 맨 앞의 덩치 큰 기장 하나가 잠시 멈칫하더니 뒤에 느긋하게 따라오던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동시에 다른 이들이 옆으로 물러서며 내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비행의 임무 기장인 내게 제일 먼저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하라는 통상적인 배려였다.
다행히 GD(General Declaration:승무원 리스트가 적힌 공식 서류)를 따로 요구하지는 않았다. 준비한다고 가방 속 맨 앞 포켓에 챙겨 두었지만 다시 꺼내려면 허리를 숙여야 했는데 다행이었다. 여권만 내어주자 익숙한 손놀림으로 빠르게 여권의 모서리를 스캐너에 한차례 읽어 내리고는
"기장님 마스크 좀 내려주세요."
"아, 미안합니다. "
코 위까지 올려 두었던 파란 수술용 마스크를 턱 아래로 내리자 멜버른 이민국의 30대 후반의 성격 좋아 보이는 여직원이 오른손으로 나의 짙은 녹색 대한민국 여권을 자신의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그의 눈이 빠르게 몇 번을 번갈아 나의 얼굴과 여권사진을 대조하는가 싶더니 여권을 내리고는 키보드에 뭔가를 한두 가지를 입력한다. 그리고는 바로 그녀와 나 사이를 가리고 있는 유리창 아래 난 위가 둥근 반원 형태의 작은 구멍으로 나의 초록색 여권을 다시 내어주었다.
"좋은 아침 되세요."
그녀가 살짝 눈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인사를 건넨다.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한 나는 먼저 나와 대기하고 있던 지상직원이 있는 곳으로 몇 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그는 우리를 이 새벽 터미널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호텔 버스까지 안내하게 된다. 가볍게 서로 다시 눈인사를 하고는 아직 입국 수속을 진행하고 있는 다른 조종사들에게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옮겨갔다.
임무 기장으로서 나는 모든 크루들이 무사히 호텔까지 체크인하는 것을 확인할 책임이 있다.
그때 내가 방금 통과한 호주 이민국 여직원이 뭔가를 질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여러분 모두 조종사 맞아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녀 앞에 서있던 덩치 큰 기장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이내 주위를 둘러본다.
"예. 한 명 저기 저분 로드마스터를 빼고 모두 조종사입니다. 이상하죠? "
"예. 이상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조종사가 많은 거죠?"
그녀가 정복을 차려입고 모자까지 쓴 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10명이나 되는 동료 조종사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그때 줄 뒤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중 6명은 멜버른에서 화물기를 몰고 며칠 뒤 홍콩과 두바이로 비행하기 위해 포지쇼닝(Positioning)하는 다른 화물기 조종사들입니다. 이중 4명만 오늘 비행을 한 크루고요."
그제야 이민국 여직원이 다시 고개를 내려 모니터를 바라보며 빠르게 키보드에 뭔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11명 크루들이 모두 이미그레이션을 빠져나온 것을 확인하고는 나는 다시 그들에게 손짓으로 지상직원을 따라가도록 하고는 그들의 뒤에서 걷기 시작했다.
짙은 청색의 조종사 정복을 잘 차려입은 10명의 조종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 순간이 '참 이질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2시 락 다운된 멜버른 공항의 터미널에는 승객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화물기 한대에서 내린 10명의 조종사와 1명의 로드마스터만이 이 텅 빈 공항 터미널을 빠져나와 대기 중인 크루 버스로 향하고 있을 뿐이다.
터미널의 주 출입 게이트 앞에 다다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동문이 스르르 열리는가 싶더니 바로 제법 쌀쌀한 바깥공기가 조금도 기다려주지도 않고 바로 13시간의 비행에 지친 크루들을 향해 밀려 들어왔다.
그제서야 2020년 7월 남반구에 위치한 호주가 한 겨울임을 모두 실감한 듯 순간 몸을 움츠렸다. 승객이 끊긴 국제공항에 홀로 새벽에 내린 777 화물기 조종사들의 구부정한 몸을 영상 6도의 서늘한 바람이 몇 차례 휘감듯 돌아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