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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 제이 Nov 20. 2019

금오산

그날 이전 난 그산을 그렇게 오랫동안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난 그 산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상황 발령! 상황 발령! 전 장병에게 알린다. 00시 00분 현재 기지 상황 000 발령”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한참 동안 계속됐다. 그날은 이렇게 요란스럽게 시작됐다.
이어지는 방송 ”전 조종사는 브리핑실에서 별도 지시까지 대기할 것. 이 시간 이후 금일 모든 비행은 캔슬한다.”
영문을 모르고 대기하던 우리들에게 누군가 조금 전 2기의 T-59가 기지로 RTB(귀환) 도중 금오산 상공에서 실종됐다는 사실을 전한다.
“누구야” “누가 타고 있던 거지?”
4명의 조종사. 편대비행으로 기지에 복귀하고 있던 두대의 T-59엔 2명의 교관 조종사와 두 명의 학생조종사가 탑승하고 있었다.


“김경모”
불과 몇 달 전까지 중등 비행 과정에서 나와 내무실을 같이 쓴 룸메이트 동기생. 오늘 아침 장교식당에서 방금 전 마주쳤던 우리들 중 제일 나이가 어렸던 동기생.
그의 이름이 불렸을 때 난 잠시 이게 꿈일 거야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아니 아주 오랫동안 그의 장례식이 끝날 때 까지도 계속 이건 꿈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1995년 1월 공군 사천기지 인근 금오산 정상


산 정상엔 아직 며칠간 내린 눈들이 켜켜이 쌓여 바위 사이를 덮고 있었다. 오전엔 산 정상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구름이 짙었지만 정오에 가까워 오면서 구름은 차츰 엷어지고 중간중간 구름 사이로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씨였다.


목격자는 전한다. 산 정상을 가린 구름 속으로 낮게 나는 전투기의 엔진 소리와 바로 이어지는 커다란 폭발음. 그가 들은 폭발음은 단 한 번이었다. 두대의 전투기는 시간차 없이 바싹 붙은 채 편대비행 상태로 산 정상에 충돌했다.


지금 이 글은 쓰는 나는 지금도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담담히 써 내려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날의 기억은 나에겐 여전히 힘들다. 이런 기억은 머리가 아닌 가슴이 하는 것 같다.


오후 3시가 넘어서야 헬리콥터가 사고 현장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헬기는 여러 번에 걸쳐 산 정상과 기지를 오가며 남아있는 조종사들의 시신을 옮겨야 했다. 워낙 광범위하게 잔해가 퍼져있고 눈까지 쌓여있어 수습과정은 지난하기만 했다.


그리고 나는 기지 의무대로 불려 간 산화한 4명의 조종사의 가장 가까운 동기생 중 한 명이었다. 수차례에 걸쳐 기지 내 의무대로 옮겨진 시신은 들것들에 실려 하얀 가운이 덮여 있는 상태로 우리를 맞았다. 마스크를 쓴 군의관이 하나하나의 들것의 가운을 벗기고 우리는 그 옆에 마련된 4명의 조종사 이름이 붙여진 또 다른 들것으로 조각난 시신을 구분해 나누는 작업을 그날 오후 내내 처리해야 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눈에 얼어붙은 아직 조종복이 붙어있는 신체의 부분 부분들을 기계적으로 나누어야 했을 뿐이다. 가장 큰 것이라야 20센티를 넘지 않았다.


이날의 충격으로 나는 그날 이후 항공기 사고가 발생한 추락 장소에 수습요원으로 가지 않았다. 2000년 김해공항에서 발생한 중국 민항기 사고 때에도 사고 현장으로의 차출을 거부했다.


연락을 들은 가족들이 늦은 밤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장례절차는 신속했다. 비행단은 돌아가야 했다. 사고로 모든 훈련비행이 중단된 상태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늦은 밤 공항으로 나가 마지막 비행기로 도착하는 김경모 소위의 부모님을 맞았다.


조종복을 벋어 걸어두고 어색한 정복을 꺼내 입고는, 외아들을 잃은 부모를 기지로 모셔오는 일도 남은 이들의 몫이었다.


그날 알았다. 공군 조종사의 정복은 남은 동료들에겐 상복이 되고, 산화한 조종사에겐 채우지 못한 관을 대신 채울 마지막 유품이라는 걸.


“미안합니다, 제 아들이 국가에 큰 누를 끼쳤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눈물을 보이지도, 감정이 격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우리들의 손을 꼭 잡고 이 말만 몇 번이고 반복하셨다.


멱살이라도 잡힐 줄 알았다. 고성을 지르고 죽은 내 아들 살려내라며 길바닥에 들어 누워 미친 듯 몸부림이라도 칠 줄 알았다.


그런데 도리어 연신 머리를 숙이고 우리들의 손을 붙잡고 사과를 하시던 아버님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좌측에서 두 번째가 고 김경모 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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