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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 제이 Nov 20. 2019

50년을 넘어 걸려온 두통의 전화

“저 혹시, 그곳이 정 00 선생님 댁이 맞습니까?”

“아~ 예 접니다. 그런데요?”  

“그런데, 어떻게 제 전화번호를 알게 되신 거죠?”


“예 국방부에 부탁을 해서 선생님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광주에 사는 000이라고 합니다. 혹시 000 씨라는 분을 기억하십니까. 이름은 모르시더라도, 1953년 가을 지리산에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사시던 분인데 혹시 기억하십니까?”


“아 예. 기억합니다. 전쟁 중에 그곳에서 그런 분을 뵌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제 어머니십니다. 어머니는 수년 전 소천하셨습니다. 세상을 떠나시기 전 제게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꼭 선생님을 찾아서 감사하다고 말씀을 전해 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아들로서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전화 수화기 넘어 중년의 남자는 통화 내내 감정이 격해져 거의 울먹이며 이 말을 전하고 있었다.


1953년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 당시 일등중사였던 이 군인은 지리산에서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 중이었다.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산사람들이 내려와 양민들을 수탈하는 가혹한 시간이 매일 반복되는 곳이었다.
그날도 지리산 자락의 민가들을 수색하던 부대는 도중 한 민가에 어린아이들과 아낙네가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혹시 숨어있을 산사람들과의 관계가 있을까 집 안팎을 샅샅이 수색한다.
하지만 곧 집안 어디에도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과 며칠을 굶은 듯 해쓱한 이들 모자만이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안타깝지만 곧 이들 군인들은 이곳을 떠나 부대에 복귀한다.. 작전의 목표가 산에 사는 주민들을 소개하는 것이었기에 그 어떤 도움도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그날 밤 여인은 어둠이 칠흑같이 내린 밤에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깬다.


“이보시라요.. 이보시라요”.. (짙은 평안도 사투리)


산사람임을 직감한 여인은 조심스레 방문을 열어 밖을 본 순간 깜짝 놀란다. 그곳에는 아까 낮에 보았던 그 군인들 중 한 사람이 보리자루를 맨 채 서 있었다. 산사람들이 활동하는 시간에 위험을 무릅쓰고 혼자서 보리 자루를 전해주기 위해 그 밤에 산길을 올라온 젊은 군인은 자루를 내려놓기 무섭게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여인이 미쳐 감사하다는 말도 전하기 전에. 아마도 양민들을 지리산에서 소개하는 작전을 진행하던 군인으로서 모두들의 이목이 있는 낮에 곡식 자루를 전해 줄 수는 없었으므로.


얼마 후 그 군인은 작전중 큰 부상을 입고 그곳을 떠난다. 이 부상으로 그는 오른쪽 눈썹 근처에 부상을 입고 그쪽 청력을 영구히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이 군인은 부상이 회복된 이후에도 무슨 이유에선가 눈가에 남아있던 파편 제거를 심지어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한사코 거부한다. 마치 그 자리에서 같이 피탄 되어 사망한 동기를 잊을 수 없었던 것처럼. 통일이 되면 그때 가서 수술을 하겠노라며.


전쟁이 끝난 후 20살의 청년, 게다가 전투 중 부상으로 한쪽 청력을 영구 상실한 의지할 곳 없던 월남한 전역 군인의 삶은 잔인했다. 평생을 공사현장에서 거 친일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고, 그렇게 자식을 키우고 나이가 들어 어느덧 70이 가까웠던 나이에 어느 날 예상치 않던 국가의 보은을 받게 된 것이다. 상이군인의 예우에 대한 법령이 개정되어 일부 청력상실도 국가 보훈 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그러나, 보훈처을 방문하여 신체검사를 하던 중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한다.


청력상실의 원인이 전투 중 발생한 폭발에 의한 부상이라는 증거가 육군 기록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때 그는 오른쪽 눈 위의 파편이 그 당시에 폭발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심사위원들도 정밀검사를 의사의 소견을 근거로 극적으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가 평생 처음으로 상이군인으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기적같이 두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첫 번째 전화가 국방부로부터 걸려온다.


"정 00 씨 되십니까. 저는 국방부의 000 사무관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먼저 너무 늦게 귀하를 찾게 되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국가를 대신해서 사죄의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귀하께서는…


1951년 00월 00일부로 화랑 무공 훈장이 수여되었으나 전쟁통에 기록이 망실되어 이제야 본인을 확인하고 훈장을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에게는 유엔군의 장진호 전투로도 잘 알려진 1.4 후퇴 당시. 기억을 더듬어 되돌아본 그 시절,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한 후퇴의 혼란 속에서 한국 육군은 엄청난 병력의 손실을 겪고 있었고 이 당시 자신이 중공군의 매복에서 살아 남아 후퇴한 얼마 되지 않은 사단 병력의 일부였던 것을 그는 기억해 낸다.


이때 누군가에 의해 추천돼 그때 수여되었어야 했을 무공훈장이 50년을 넘겨 이제야 비로소 보훈처의 DB에 그의 이름이 등록되면서 그 주인을 찾게 된 것이다.


이 일이 있기 수년 전 지리산에서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던 한 할머니가 아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전쟁 중 은혜를 베푼 한 군인을 찾아 대신 꼭 감사했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계급과 이름 석자뿐.


전쟁 중 국방부 기록이 망실되어 찾지 못하다, 전쟁이 끝난 지 자그마치 50년이 넘어서, 그해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의 신원이 확인되어,


그 아들은 전화로나마 세상을 떠나신 노모의 마지막 유언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두 번째 전화였습니다.


바로 이 소설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 육군 일등중사 정 용 일.


평안북도 의주 출신 돌아가시기 전


평생 동안 북에 두고 온 노모와 어린 동생들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하시던 저의 아버지입니다.


임종을 앞두고 의식이 혼미하셨던 마지막 순간 중환자실에서 당신을 찾아온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시고 평안도 사투리로 물으셨습니다.


"용무가 머이가?"
무슨 용건으로 나를 찾았냐는 오래된 군대식의 어투.


아버지는 그 순간 아직도 1950년 전쟁 당시의 그 군인이셨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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