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비행기를 타기 위해 비엔나 공항으로 가는 날.
나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블라우스에 청바지를 입었다.
비행기를 타는 날은 무조건 여유가 있어야 한다.
옷 품에, 시간에, 마음에, 체력에, 가방 속 공간에, 돈에....
안 그러면 작은 일을 그르치고,
작은 일을 그르치면 혼비백산 허둥대다가 큰일을 그르치게 되기 때문이다.
여유 있게 공항에 도착해,
여유 있게 탑승수속을 하고,
여유 있게 보안심사대를 통과하는 과정인데
보안요원이 내 가방을 좀 열어보라고 한다. 보안이 까다롭다는 소문을 내고 싶었는지 나 말고도 주변의 여러 여행자들이 (주로 세상 무해해 보이는 젊은이들)이 시키는 대로 가방을 까는 상황이었다.
워낙에 마음의 여유를 장착하고 있던 나는 미소씩이나 보이며 가방을 열어 보였다. 사실 보안 엑스레이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품목을 이미 예상까지 하고 있던 터였다. 잡동사니 파우치 안에 가지고 다니는 새끼손가락 만한 가위. 역시 그것이었고 보안요원은 사실 내 가방 속의 물건 따위엔 별 관심 없이 그냥 삼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듯, 상황은 시시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래서 또 여유 있게 면세구역 안을 어슬렁거리다가 한적한 화장실까지 다녀온 뒤 여유 있게 탑승게이트 부근의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리는데, 주변에 있던 어느 중년의 여자가 한국인인지 아닌지 확인 절차도 없이 한국말로 말을 건다.
“이 옷이 원래 이런 거예요? 아니면 낀 건가?”
앗! 뭐지?
내가 한껏 장착한 여유 따위 한순간에 뚫려버린 채 혼비백산했다..
화장실에 다녀오며 블라우스 끝자락의 일부가 바지 안으로 들어가 있던 거다.
나는 그런 민망한 차림으로 우아한 고양이 걸음을 흉내 내며 공항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수많은 대처 방법들이 머릿속에 떠오름과 동시에
갈등할 시간조차 없이 밖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아 그래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그리고 역시 여유 있게 쓰윽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한다.
“감사합니다.”
친절한 여자가 대꾸 없이 사라진 자리에 나는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라면, 나라면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을까?
아마도 이야기할까 말까, 최소 5분을 망설이며 갈등하다가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말해 주기를 바랐을 거라 생각한다.
이런 건 뭐랄까......
그냥 인정이라고 말해야 한다.
대가가 없어도 다른 사람 도와주는 걸 좋아하는 심성의 아줌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유를 몰랐다. 사실 옷자락은 바지 위로 올라가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민망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그러다가 이내 깨달았다.
나는 나의 솔직하지 못함에 스스로 민망했던 거다.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을까?
남 도와주는 걸 좋아하는 인정 많은 아줌마가 대꾸도 없이 사라졌을 정도로.
“어머 어머 어떡해? 에구 창피해라...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이랬어야 하는 게 맞다. 사실 그게 내 마음이었던 거다.
그래. 하필이면 그때 나는 나름 우아한 고양이의 모드가 아니었던가?
갑자기 모드 전환을 할 수가 없었다고, 순발력 탓으로 변명을 해 보자.
그래도 못난 건 마찬가지다.
여유만 일시 장착했지 기본적으로 장착돼 있어야 할 솔직함은 결핍.
오늘의 셀프 평가를 하며 귀국행 비행기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