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말하자면 비혼주의, 혹은 독신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김준과 서신희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외적 조건상, 어디다 내놓아도 빠질 데 없는 남녀였지만 나이가 먹도록 결혼은 남의 일로만 여겼다. 어린 시절 그들의 부모가 이혼했다는 공통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부부’란 지독히 불합리적인 인간관계, 경솔하게 맺어진 악연에 불과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두 사람이 사랑에 빠져 가끔 결혼을 꿈꾼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같이 집을 가꾸고, 아이의 부모가 되고, 같이 시련을 겪으며 성숙해 가는 일, 공식적이며 법률적으로 상대가 ‘내 사람’으로 인정되는 그 뿌듯함과 당당함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둘 중 누구 하나라도 ‘결혼하자’고 청한다면 결혼이 이루어질 것만 같은데, 둘 중 누구도 결혼을 청하지 못했다.
그런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은 이대로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결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아니 결혼을 해도 될지, 안 될지, 그 답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 답을 얻는 방법으로 ‘여행’을 택했다.
그냥 여행이라면 새로울 게 없지만, 이번 여행은 그냥 여행이 아니라 반드시 ‘답’을 가지고 돌아와야 하는 여행이었다. 그런 것도 가능하냐고 물었을 때 두둥실 여행클럽은 우선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겪고 있는 재정난을 생각한다면 한 명의 고객이라도 놓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구아정의 책상서랍 속에 여러 장의 독촉장이 쌓여 있다는 것을 안수호는 알고 있었다. 처음 여행사를 시작했을 때가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창업 멤버는 구아정과 안수호, 그리고 그들의 대표 격인 B.J. 그때 B,J는 꽤 많은 융자를 끼고 지금의 이 집을 샀다.
여행사는 근근이 굴러갔지만 당연히 수지맞는 장사는 아니었다. 게다가 B,J가 사라진 이후 경영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 갈수록 더 고난도의 서비스를 요구해 오는 고객들, 그러나 여행비도 올릴 수 없었고 매니저들의 실수를 항의하며 환불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다. 언제부턴가 융자금의 이자가 밀려가고 이제는 원금상환이 코앞에 닥쳐 있었다. 그러나 사라진 B.J는 나타나지 않았다.
안수호가 조심스럽게 구아정에게 제안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어떤?”
“사무실을 좀 옮겨본다든가.......”
하지만 구아정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마음 모르지 않았다. 그 집에는 세 사람의 꿈과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B,J가 다시 돌아와야 할 곳이기도 했다. 집을 지킨다는 것은 구아정에게 B.J와의 사랑의 약속을 지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했다.
바로 그런 의미 때문에 안수호는 이제 그만 그 집을 떠나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대신 독촉장들을 몰래 들고 나가 이자를 갚았다. 그러기 위해 대출을 받아야 했다.
‘결혼에 대한 답을 찾는 여행’....... 오랜 시간 회의를 했어도 묘안이 나오지 않았다. 우선 이번에는 매니저가 동행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결혼을 고민하는 남녀의 여행에 제삼자가 낀다는 게 서로에게 불편했으니까. 그런데, 대체 어떤 곳에 가서 어떤 과정을 거쳐야, 긍정이든 부정이든 결혼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출발 전날까지도 만족스러운 아이디어가 없었다. 이럴 때 택할 수 있는 방법이란 단 하나, 우연, 아니면 요행, 아니면 하늘이 허락한 기적을 기대하는 것뿐이다. 답이란 어차피 본인들이 찾아야 할 몫, 여행클럽은 그저 뭔가 뜻밖의 일이 많이 벌어질 것만 같은 보통의 여정을 준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계획된 여행 기간 중에 지역의 축제가 있었고, 숙소는 매일 다른 곳으로 옮기게 돼 있었다.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지혜를 얻는 ‘이벤트’도 빼먹을 수 없었기에 송기석의 지인을 배치했다. 자기계발 분야의 스타 강사급인 송기석의 지인은 우연을 가장하여 그들을 만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그리고 결혼의 명과 암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영화들, <내 남자의 유통기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를 찾아 줘> 등과 TV시리즈 <사랑과 전쟁>을 어디서나 볼 수 있도록 USB에 담아서 전달했다. 이 여행의 답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아무도 할 수 없었다.
김준과 서신희는 기차를 타고 떠났다. 충청도를 거쳐서 전라도 최남단까지 가는 노선이었는데, 이제껏 들어보지도 못한 작은 역을 다 들러 가며 아주 천천히 달렸다. 아니, 달렸다기보다는 거닐었다. 기차 안에서 영화 한 편을 보고 아주 기분이 찜찜해 있을 때 기차는 ‘소그랭이’라는 작은 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쯤이지?”
“몰라, 아직 충청도인 거 같은데?‘
“이름 웃기다. 소그랭이.”
“나 충청도는 한 번도 안 가봤어. 웃기지?”
“정말? 내려 볼까?”
두 사람은 순간 눈빛을 교환한 뒤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들고 기차에서 내렸다. 여행의 묘미가 돌발 상황에 있는 거라지만, 이런 식으로 어긋날 거라면 여행사에 의뢰는 뭐하러 했을까 마는, 사실 여행사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일 수도 있었다. ‘답’을 못 찾는다 해도 그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니.
역은 겉에서 봤을 때만 역이지, 막상 안으로 들어오니 역장의 사택이었다. 그나마 역장은 낮잠을 자고 있었고 역장의 아내가 땡땡땡 하는 신호를 울리고 돌아와서는 다시 빨래를 널었다. 그러다가 기차에서 내린 남녀가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희한하다는 표정이었다.
“여기가 소그랭이에요?”
서신희가 물었다.
“그류....근디 여기는 뭐하러 왔대유?”
“글쎄요. 여기 뭐, 좋은 데 없나요?”
“좋은디? 저기 가면 좋은 계곡이 하나 있슈.”
역장의 아내는 심드렁하게 말한 뒤 빨래바구니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리 걸어도 사람 하나를 만날 수가 없었고 엉덩이 한 번 걸칠 데가 없었다. 그 ‘좋은 계곡’이라는 건 얼마나 가야 하는 건지 조악한 표지판 같은 것도 없었다. 무작정 산 쪽을 향해서 팍팍한 흙길을 걷고 또 걷자니 후회가 밀려왔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다. 설상가상으로 여자의 발뒤꿈치가 까져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슬슬 짜증이 나고 누군가를 원망이라도 해야 살 것 같았다. 누가 먼저 여기 ‘소그랭이’에서 내리자고 했던지, 그걸 따져 묻고 싶기는 둘 다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내리는 게 아니었어.”
“그니까.....,”
“다시 역으로 돌아가자.”
“그거 알아? 여기 기차가 하루 두 번밖에 안 서더라.”
“그런데 여기서 내리자고 했어?”
“누가?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