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 마지막 이야기
그때부터 안수호는 마치 마음의 문에 걸어두었던 빗장이 풀린 듯 자기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 여인과의 답답하고 변덕스러운 대 여섯 시간 동안 그 마음의 빗장이 삭아서 부서진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감이 없는 성격, 그래서 자격증에 집착했던 세월, 대학생활의 전부라 할 수 있었던 여행 동아리, 그때의 위험하고 짜릿했던 여행의 기억들, 꿈을 나누었던 친구 B.J, 너무나 사랑했지만 그 친구의 여자가 돼 버린 아정.......
안수호가 띄엄띄엄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기차는 수없이 들어왔다가 떠나갔으며 갓난아이는 몇 번을 깨어나 보채다가는 다시 잠들었고 날은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어떡할까요?”
안수호가 여인에게 물었다. 지금이라도 떠날 것인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여인의 답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더 늦기 전에 고백하셔야지요. 그분도 동행이 필요하실 거예요. 오늘 저처럼.”
안수호는 옆에 앉은 여인을 바라봤다. 그 순간 여인은 자기에게 어떤 답을 주기 위해 가장 여리고 희미한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처럼 보였다. 한 동안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여행사로 돌아갈까요?”
“그럼 여행은 안 가실 건가요?”
“저한테 그러셨죠. 여행은 여행준비로부터 시작된다고. 전 이제 준비가 끝난 것 같아요. 오늘이 아니라도 언제라도 떠날 수 있어요.”
그때, 흐느끼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진태우가 다시 역으로 찾아왔다. 자고 일어난 큰애가 너무 울어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며. 큰애는 엄마를 보자마자 울음을 뚝 그쳤다.
이제 엄마는 아이에게 아침을 먹이고 어린이집에 보낼 것이다. 언제나의 아침처럼.
아까부터 진태우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달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행 중에는 고객의 여행에 관련된 이야기만 할 수 있다’는 직원 규칙을 지키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 안수호의 눈에도 보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저러는 걸까?’
여인은 처음 나타났던 대로 한 아이를 둘러업고, 또 한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이의 요청대로 24시간 문을 여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뭔가 따뜻한 것을 먹은 뒤,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엄마가 지금 굉장히 졸리거든. 그러니까 오늘은 어린이집 가지 말고, 그냥 엄마랑 집에서 뒹굴뒹굴하자.”
아이는 소리치며 기뻐했다.
여인과 아이가 천천히 역사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본 진태우가, 조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여행 끝난 거죠?”
“응... 그런 것 같네. 지독하게 길고도 짧은 여행이었어...”
진태우는 그럴 새 없다는 듯 안수호의 말을 잘랐다.
“지금 난리 났어요. 빨리 좀 들어가 보세요.”
그 순간, 안수호의 뒷골로 서늘한 기운이 쓱 지나갔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B.J가 한 장의 사망통지서로 돌아와 있었다. 사망일자는 두 달 전, 사망지는 인도의 어느 지방이라고 했다. 여행자들의 동행 매니저로 유럽에 갔다가 혼자 남아 여행루트 개발 중이던 그가 도대체 왜 중간에 사라졌는지, 어쩌다가 인도로 갔는지, 왜 연락을 못 했는지, 그리고 왜 죽었는지, 심지어 정말로 죽은 건지,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았다.
(두둥실 여행클럽 제1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