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커다란 황금색 물체와 마주쳤다. 그것은 유리관 안에서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사람들의 두 눈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성인 남성 상체만 한 '샴페인'이었다. 미끈하게 잘 빠진 몸매는 온통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클럽의 조명이 샴페인 황금 표면에 반사돼 영롱하기 까지 했다.
'아르만 디 브리냑 골드'
전 세계에서 일 년 동안 불과 4천 병도 채 생산되지 않는다는 명실상부한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12리터짜리 이 초호화 샴페인은 버닝썬 입구에 진열된 유리관 안에 다른 고급 코냑과 함께 잘 모셔져 있었다.
'1억 원'
클럽 내부로 들어서는 사람들은 이 황홀한 샴페인과 마주하는 순간, ‘오늘은 어떤 VVIP가 이 샴페인을 터트릴까?’ 라며 기대감에 젖어 입장했다. 왜냐하면 실제로 버닝썬에서 이 초고가의 샴페인을 터트린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황금 샴페인과 '1억' 메뉴, 그리고 '힙'한 음악이 뒤엉켜 사람들을 더욱 현혹했다. 클럽에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흥분이 안될 수가 없었다.
당시 실제로 버닝썬 클럽 내부 입구에 전시되어 있던 만수르 세트
버닝썬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는 이 아르망 디 브리냑 골드 샴페인은 아시아 전체 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봉되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희소성이 높다는 얘기다. 강남 클럽을 돌며 돈다발을 뿌린 사업가 ‘헤미넴’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이 샴페인을 땄고, 30리터짜리 특 대형 사이즈를 추가로 주문해 아시아 최초로 오픈했다고 세간에 전해지고 있다.
아르망 디 브리냑. 이 샴페인이 유명해진 건 비욘세의 남편인 힙합 가수 제이지가 사랑에 빠진 샴페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클럽 버닝썬의 1억 원짜리 만수르 세트
승리는 이 샴페인 세트에 ‘만수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르망 디 브리냑 골드 샴페인과 루이 13세, 일반 아르망 디 샴페인 10병으로 구성돼 있다. 아마도 승리는 버닝썬을 오픈할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이 샴페인 세트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탄생한 이름이 ‘만수르'다
만수르는 원래 아랍에미리트(UAE) 부총리의 이름이다.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 그는 아부다비 왕가의 둘째 아들이다. 2008년부터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시티의 구단주를 맡기도 했다. 이 사람의 개인 재산은 어마어마한데, 세간에는 약 34조 원가량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중동의 대표적 갑부를 표현할 때 ‘만수르’라는 그의 이름을 흔히들 대명사처럼 사용하곤 했다.
승리는 한 나라의 부총리이자 왕족이면서 사업가이자 세계적 투자자의 이름을 자신이 운영하는 클럽에서 파는 샴페인 세트에 갖다 붙였다. 만수르 같은 갑부만 살 수 있는 초호화 샴페인 세트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붙였을까? 아니면 이 엄청나게 비싼 술에 세계적 갑부의 이름을 붙여 더 고급스럽게 보이기 위해서였을까?
그런데, 승리는 이 1억 원짜리 샴페인 세트의 가격과 이름을 ‘장난 삼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 근거를 찾아냈다.
2018년 가을, 일본 후지 TV의 한 예능 프로그램.
당시 승리는 금요일 밤 10시에 하는 이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버닝썬 클럽을 운영하면서 생긴 일화들을 털어놨다. 일본 최고의 개그 콤비 '다운타운'이 게스트와 저렴한 이자카야 같은 술집에서 만나 취중 토크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승리는 그 프로그램의 '하시고 사케'(本音で ハシゴ酒)라는 코너에 출연했다. 하시고 사케는 우리말로 ‘계속해서 자리를 옮기며 마시는 술’을 뜻하는데, 쉽게 말해 ‘2차 술자리’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승리는 통역 없이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MC 들의 질문에 응답했다.
'다운타운 나우' 프로그램 中
진행자 1 : “버닝썬은 잘 되고 있는 겁니까?”
승리 : “솔직히 다 말씀해 드릴게요. 메뉴 하나에 1천만 엔(한화 약 1억 2천만 원), 5백만 엔(한화 약 6000만 원) 적어 놓고, 아주 비싼 와인들로 상품을 구성해 장난 삼아 팔아 봤는데요. 손님들에게 '이 정도 가격인데 괜찮아요?'라고 물었더니 대부분 손님들 반응이 '재미있잖아요' 하면서 다들 사주는 거예요"
진행자 1 : “역시 CEO!!”
승리 : “누구도 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그만 유행처럼 돼버린 거예요”
진행자 2 : “장난 삼아 한번 시도했던 것이..”
진행자 1 : “눈에 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역시 사는 군”
다운타운 멤버 마츠모토 히토시와 하마다 마사토시는 일본 개그의 역사를 새로 쓴 남자들로 불린다
프로그램 진행자들은 승리의 말에 모두들 놀라워하면서도 재미있어했다.
그런데 나는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만수르’라는 이름의 기원은 아랍어로 '나스르(nasr), 우리말로 '승리'를 뜻하는 것이다. 즉, ‘만수르’의 원래 뜻이 ‘승리’라는 얘기다.
1억 원짜리 초호화 샴페인 세트에 붙인 이름이 본인 이름을 뜻하기도 한다는 것을 승리는 알고 있었을까?
버닝썬에는 1억 원짜리 만수르 세트뿐 아니라 5천만 원짜리 세트도 있었다. 중국인 VIP들을 겨냥한 메뉴였는데, 이름이 ‘대륙 세트’다. 또 1천만 원짜리 ‘천상 세트‘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버닝썬 직원들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되었다. 중국인 VIP 고객들이 계산을 할 때 5만 원 권 현금 뭉치를 들고 온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큰돈을 현금으로 들고 다닐까? 하지만 1억 원이라고 해봤자, 음료수 비타 500 작은 박스에 5만 원 권을 담으면 딱 1억 원이다. 중국인 VIP 들은 5만 원 권 뭉치를 비닐로 똘똘 감아오거나 쇼핑백에 담아와 건넸다고 한다. 세무 당국의 추적이 전혀 되지 않는 돈이었다.
버닝썬 메뉴판. 중국인 VIP들을 겨냥해 이름도 '대륙 세트'라고 지었다
샴페인 몇 병의 가격이 수천만 원을 훌쩍 넘겼다. 우리는 문득 원가가 얼마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한번 따져봤다.
1억 원짜리 '만수르 세트'는 마진을 6천2백만 원 남겼고, 5천만 원짜리 '대륙 세트'는 원가가 1천5만 원이었다. 클럽은 세트에 따라 많게는 6배나 비싸게 팔고 있었다. 클럽에서 술값은 대개 현금 뭉치로 계산이 이뤄졌고, 비단 버닝썬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당시 가장 잘 나가던 클럽 '아레나' 등 대부분의 클럽들이 비슷한 상황이었다.
나는 가늠쇠를 클럽 탈세 의혹으로 정조준했다.
누군가는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국세청 또한 이 문제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었다. 급기야 세무 당국의 클럽 세무조사 과정상 문제점이 포착돼 경찰이 서울지방국세청을 압수수색하기에 이르렀다. '버닝썬 게이트'의 새로운 아젠다 세팅이 이뤄지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본격적인 탈세 보도가 시작되고 정확히 나흘 뒤, 세팅했던 아젠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어느 연예인의 이름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정준영'
그의 이름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이른바 연예인 단톡방 성범죄 사건은 버닝썬의 모든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클럽 마약과 약물 성범죄, 유착, 탈세 등 강남의 거대한 검은 카르텔이라는 '본질'이 사라졌다. 그리고 연예인 성범죄가 마치 버닝썬 게이트의 핵심으로 '변질' 되어 가고 있었다.
정준영은 사실 버닝썬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냥 승리랑 친했고, 승리는 문제의 단톡 방에 들어가 있었다.
모든 언론이 정준영 등 연예인들만 쫓았다. 왜, 하필, 이 시점에서.. 답답했다. 누군가 사건 흐름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일부러 흘린 것일까? 온갖 의구심이 일었지만, 밝혀 낼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