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는 이모가 아니었다
비밀 이야기 (부제: 이모는 이모가 아니었다)
2020년 11월 12일 목요일
아침 일찍 학교에 도착하여 무거운 가방을 들고 현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키가 작고 야윈 그리고 약간 추워 보이는 듯한 아이가 걸어 온다. 어깨까지 길어 진 머리를 뒤로 대충 묶은 머리, 멋이란 건 그다지 생각하지 않은 듯한 외모와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아이. 지난 해 2학년 초 우리학교로 전학 온 아이다.
아무 말도 없이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 와 이 것 저 것 달라고 요구를 했던 아이. 전혀 상냥하지도 예의 바르지도 않아서 조금 냉정하게 대했던 아이다.
그 아이가 어느 새 3학년이 된 소정이다.
2학년 초 우리학교로 전학 온 소정이는 3학년 남학생을 오빠라고 부르며 매일 함께 상담실로 놀러 오곤 했다. 그 때는 지금보다도 더 아기같이 여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3학년 남학생 오빠는 친구들과 갈등없이 잘 지내는 아이였다. 학급 친구들하고도 튀지 않게 행동을 해서인지 항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동학년 친구들 중 힘센 남학생이나 까칠한 여학생들과의 갈등이나 괴롭힘도 없어서 참 순한 아이라는 생각이 드는 남학생이었다.
소정이가 그 남학생을 너무 가까이해서 나는 친오빠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가족들이 서로 알고 지내는 이웃사촌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소정이가 우리 학교로 전학을 오면서 부모님이 소정이를 챙겨달라고 부탁한 듯 했다. 그 무렵 소정이는 늘 그 오빠와 등,하교를 함께 했다. 요즘 아이들은 남녀 모두 이성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알고 있어서 나는 염려가 되었다. 혹시나 호기심으로 검색한 유투브 채널이나 인터넷 검색 등이 아이들을 이상한 세상으로 몰고 가서 문제를 일으킨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거리두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고 함께 올 때마다 살짝 거리두기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의 관계가 소원해 진 걸 알게 되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긴 방학과 원격수업 등으로 등교 일수가 적어져 접촉 기회가 줄어 든 까닭이기도 한 것 같다. 그렇게 오누이처럼 착 달라붙어 함께 다니던 둘 사이가 아주 먼 남남처럼 멀어지고 소정이는 어느 날부터 같은 반 여자친구인 예성이와 함께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3학년이 된 소정이는 아기티가 나지 않았다. 이제는 어느새 성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소정이에게 물었다.
‘왜 그 오빠랑은 같이 다니지 않는 거야?’
그러자 소정이는 그 오빠가 자기 방에서 3천원을 훔쳐 가서 부모님이 만나지 말라고 했다고 했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그 오빠가 돈을 훔쳐갔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말하며 네가 그 걸 보았느냐고도 물었다. 그러자 그 걸 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있었던 돈이 그 오빠가 왔다 간 날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남학생이 도둑으로 몰리는 것도 도둑이 되는 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워낙 순한 남학생이라서 그저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소정이는 끝까지 돈의 행방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 오빠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나는 네가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 돈을 가져 간 사람이 오빠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후도 소정이는 매일 아침 내가 상담실에 도착하면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오곤 했었다.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정이에게서는 이른 아침부터 허전하고 의욕이 나지 않는 생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무기력한 냄새가 풍겼다.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은 날씨가 좀 추워지자 분홍색의 예쁜 폴라폴리스 점퍼를 입고 온 것이었다. 나는 그게 참 다행스럽고 반가웠다.
‘점퍼 새로 산 거야?
예쁘다! 아주 따뜻할 것 같다.
색깔이 어쩜 이렇게 예쁜 거냐?
이거 비싼 메이커네. 이번에 산 거야? ’
‘네!’
부모님이 사 주신거라고 했다. 엄마랑 아빠가 함께 가서 산 옷이라고 했다.
엄마 아빠 모두 아침 일찍 출근해서 자기도 일찍 학교에 오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아! 그랬구나!
엄마랑 아빠랑 함께 간 거구나!
엄마랑 아빠 두 분 모두 직장생활을 하는 거구나!
좀 힘들겠지만 좋겠다.’라고 말하며 염려했던 마음을 놓았다.
두 분이 새벽부터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니 아주 가난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을 거르는 소정이가 혹시나 이혼가정의 아이는 아닐까 염려했었는데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소정이의 말을 그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었지만 믿고 싶었다. 그래서 믿었다. 소정이가 엄마랑 아빠랑 행복하게 살고 있는 거라고~다만 두 분 모두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서 그 공백이 소정이를 쓸쓸하게 보이게 하는 것뿐이라고~~~~
그랬던 소정이가 아침 일찍 현관 쪽으로 걸어가던 내 눈에 포착된 것이다. 분홍색 폴라폴리스 점퍼와 헐렁한 청바지를 입고 무기력하게 휘청이며 걸어오는 아이~
그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두 팔을 벌려 반가움을 표현하며 달려왔다. 교실이 아닌 교실밖에 있는 소정이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님 아침의 상쾌하고 찬 가을 바람이 나를 기분좋게 해서인지 나 또한 아주 많이 반갑게 느껴져서 우리는 마치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것처럼 기쁘게 만났다.
아침도 먹지 않고 등교했을 소정이~~
왠지 무언가 그 아이 속에 말하지 않은 비밀이 숨어있을 거라고 늘 생각했던 아이였다. 우리는 현관에 들어서서 서로 실내화로 갈아 신은 뒤 화상 카메라 앞에서 온도 체크를 한 뒤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나는 2층 상담실로 향했고 소정이는 3층 3학년 교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나는 상담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며칠 전부터 읽으면서 발췌하기 시작한 ‘빨강머리 앤’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세상 모든 여성들이 앤만큼 지혜롭고 당당해지기를 꿈꾸면서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던 한 작가의 글을 읽고 있었다.~~그러면서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아침 나의 독서타임 시간에 찾아 와서 엉뚱한 행동을 했던 아이~ 초성게임 문제를 만들어 풀어 보라고 했던 아이~~
엉뚱한 말을 A4용지에 써 놓고 갔던 아이.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다만 지루하고 별 재미없는 세상이라고 말했던 아이를.
심심한 표정으로 멋도 부리지 않은 약간 중성적 이미지를 풍기는 그 아이 소정이가 분명 저 앞문을 열고 들어 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마음의 문을 열어 솔직함을 나누고 싶었다. 소정이와 진심으로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그 날이 바로 오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소정이가 나의 예상과 다르지 않게 문을 열고 들어 왔다.
이른 아침의 이 시간은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던 나 혼자만의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8시 10분까지는 적어도 나만의 시간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시간을 그 외롭고 허전하고 쓸쓸하고 무기력함과 울적함마저 품고 있는 저 아이~~ 어린아이의 해맑음을 잃어버린 일찍부터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상실해 버린 듯한 저 아이와 진지하지 않은 표정으로 진지한 내면을 열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알게 된 이야기는 불과 10분 만에 폭탄처럼 터지듯 펼쳐졌다.
하지만 길고 길어서 몇 편의 장편 이야기가 나올 것만 같았다. 복잡했다. 함께 산다는 엄마는 다른 지역에서 4살 동생과 살고 있고, 대학에 다니는 스무 살 언니 또한 다른 지역에 살고 있다고 했다. 스무 살 언니의 엄마와 자신의 엄마는 다른 사람이지만 언니는 나의 친언니라고 강조해서 말했다. 하지만 언니를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갑작스럽게 등장시킨 이모는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새엄마라고 했다. 그 아이의 언어속에 보통의 아이들과는 달리 엄마보다는 아빠가 훨씬 더 많이 존재했던 이유를 마침내 알게 되었고, 잠이 깨어 곧바로 학교로 와서 한 시간 가까이 교정을 서성이는 까닭에 대해서도 조금 알게 되었다.
그 집안의 가계도에는 복잡한 스토리가 숨겨져 있어서 한 번 꺼내면 분명 상상 이상의 어떤 갈등과 불만이 드러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마음이 놓였다. 자신이 아빠를 사랑하고 아빠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했다. 아빠는 착하다고 했다. 새엄마가 정리를 못했다고 자신을 꾸중하면 아빠가 정신없이 치워 주신다고 했다.
소정이는 A4용지에 그린 그림을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 그림은 아빠한테만 보여주는 그림이라면서 인어공주와 상어와 우유곽 등을 그려 놓은 종이를 내게 보여 줬다.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지 3년이 되어가는 나보다 표현력이 뛰어났다. 나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하다! 어쩜 이렇게 표현을 잘 하는 거니?
난 3년을 배웠어도 아직 너처럼 표현할 수 없어.
관찰력이 대단하구나!!’
근데 왜 네가 그린 그림을 아빠한테만 보여 드려? '
'아빠가 좋아하셔서요~~'
새엄마는?
......
소정이는 나의 칭찬에 갑자기 무슨 발동이라도 걸린 듯 직사각형의 흰 면 행주를 둥글게 접어서 내게 보여 주었다.
‘예쁘다! 이건 또 뭐야? 어떻게 이렇게 이쁘게 접은 거야? 나도 알려줄래.’
소정이는 내게 자세히 접는 법을 알려 주었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소정이는 유투브를 통해 배운 거라고 했다.
‘오오 정말 대단해!!’
‘소정아, 왜 지금까지 이 곳을 왔다갔다하면서 너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니?
일찍 얘기 해 줬더라면 우린 더 빨리 친해졌을 텐데~
넌 마음을 터 놓을 사람이 없었잖아. 힘들어도 말이야.
그래서 힘들었던 거잖아. 고민을 말할 사람이 생길 수 있었는데~~
이젠 힘들 땐 힘들다고 말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지루하고 별 재미없는 세상에 대해서
나에게 말해 줘.
머릿속으로 혼자 고민하지 말고~~
난 너의 비밀을 지켜 줄 거니까!’
나는 아주 기쁘고 반가운 목소리로 소정이에게 말해 줬다.
‘이모가 잘 해 줘?
소리만 질러요.~~
원래 친자식 아니면 그러는 거예요.
귀에 구멍이 날 것 같아요.'
.......
이모는 이모가 아니었고 새엄마였다.
갑자기 말문을 터 놓기 시작한 소정이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쏟아 놓았던 폭탄같은 말을 나는 아마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또한 잊어서도 안 될 것 같다.
우린 친구가 됐다. 모든 걸 털어 놓기로 했다. 나도 힘들 땐 투정부리듯 소정이에게 털어 놓겠다고 했다.
그리고 꼭 비밀을 지키자고 약속 했다.
이제 나에게도 얼마간은 새로운 아침 과제가 생겼다.
아침 업무 시작 전까지 소정이의 방문을 환영하고 함께 친구가 되어 주는 일.
모든 걸 잘 견뎌 보려고 보이지 않게 노력하는 소정이를 응원하는 일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소정이가 꽃송이처럼 해맑게 활짝 웃으며 늘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