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그저 흘러갈 뿐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어

by 보라구름
시간이 약이야.
지나고 나면 괜찮아져.


자주 듣는 말이고, 가끔 하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처음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반쯤 맞고 반쯤 틀리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저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연히 웹툰 <땅 보고 걷는 아이>를 정주행 했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부터 대학생이 된 시기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을 겪고, 가정 폭력 속에서 자라난다. 자존감을 깎아내리고 언어적,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엄마와 갈등을 빚으며 벌어지는 일들이 주 내용이다.


부모님은 이혼을 하지 않으셨고, 웹툰에 나오는 엄마처럼 나의 엄마가 험한 말을 자주 퍼붓거나 자존감을 깎는 말을 내세워 수시로 공격하지도 않았고, 아들 딸 확실히 차별하며 서럽게 한 적도 없다. 모든 게 다 비슷해서 그런 게 아니라, 언어적인 폭력과 방임, 정서적 학대 및 가끔 벌어진 물리적 폭력이 유년기부터 30대 초반까지 25년 가까이 이어졌다는 걸 웹툰을 보다 새삼 느꼈다.


예상하지 못한 감정의 폭풍에 휩쓸려 이리저리 맥없이 꺾여 쾅쾅 부딪혔다. 웹툰을 보고 나니 갑자기 온갖 기억이 튀어나왔는데, 그게 너무나 생생해서 생경했다.


엄마가 이혼하면 너네는 고아원 가서 살거나 아니면 계모랑 살 텐데 내가 너네 그런 꼴 당하게 할 수는 없어서 참고 산다.
엄마랑 아빠 이혼하면 누구랑 살래?
아빠 지금 가게에서 사람들하고 화투 치나 안 치나 몰래 보고와. 아빠한테 들키지 말고 몰래.
아빠한테 전화해서 엄마가 이상하다고 해. 막 헛소리 하다가 지금은 말도 안 하고 누웠다고 미친 거 같다고 해. 엄마 살기 싫다.
중국집에서 시켜 먹자. 떡볶이 사 먹고 와. 점심은 이걸로 먹어. 저녁은 저걸로 때우자. 엄마 피곤해.
엄마 나갔다 올 동안 문제집 여기까지 풀라고 했는데 이게 뭐야. 거의 하나도 안 했네? 같이 죽자.(커다란 부엌칼을 들고 와서 이성을 잃은 표정으로 고함을 지름, 휘둘렀는지 어쨌는지는 기억 안 나고 공포감만 아직도 생생함)
친구네 집에 갔다 오면 다야? 제때 돌아와야지, 한 시간이나 지났잖아! 현관 앞에서 뺨을 때림(현관에 못 들어갔고 당시 집 구조가 계단이 건물 밖에 노출되어 있어 맞는 모습이나 소리가 지나가는 사람, 동네 옆집 등에서 다 들리거나 보일 거 같아서 너무 수치스러웠음)
콩쿠르대회 나가서 1등을 하진 못할망정 실수(너무 긴장해서 한옥타브 위로 첫 음을 시작해버림)를 해서 망신살 뻗치게 만들어? 피아노 학원 원장 딸이 이게 뭐야! (길에서 걸어가면서 10분 넘게 큰 소리로 쌍욕!_길에서 쌍욕 하는 사람 보고 천박하다고 하던 분이었음)
누굴 만난다고? 걔가 누군데? 웃기네. 너 만나주는 사람도 없지? 창피하니까 혼자 나가서 영화나 볼 거면서 누구 만난다고 거짓말하는 거지?(외출할 때 현관 앞에서 비웃으며)
외모에 신경 좀 써라. 그게 뭐니? 하고 다니는 게. 갖다 버릴 싸구려 옷 좀 그만 사고 제대로 된 거 한두 벌 사서 돌려 입어. 화장도 안 하고 다니면 너무 게을러 보여. (외출할 때 현관 앞에서 한심한 표정을 짓고)



유치원생, 초등학교 저학년, 중학교 다닐 무렵까지의 기억이 마구 튀어나왔다. 부부싸움 심해지는 날이면 집에서 칼이나 뾰족한 걸 찾아다 세탁기 속에 넣어 감출 때 심장이 쿵쾅거리던 기억도. 내 월급을 정말 1원도 안 남기고 모두 가져가면서 결국 나를 20대 초반의 나를 내가 쓰지도 않은 신용카드를 돌려막기로 생활비로 쓰고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로 만든 것도. 생일날 편의점 캔맥주에 과자 사 와서 집에서 먹으려니 그 딴 데 돈 쓰고 있다고 고함을 치던 것도.


물론,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던 시절에는 항상 내 옷이나 머리핀 등을 제일 먼저 사주고, 원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사주기도 했다. 이후로도 어떻게든 파탄난 가정을 살려보려고 고군분투했고, 끝내 이혼은 하지 않음으로써 가정을 지켰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덕분에 부모가 되는 것이 공포 그 자체가 되어버려서 자식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늦었지만 명확히 깨달았고, 그런 점에서 나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이 아주 큰 안심이 된다.


굳이, 기억을 들출 일이 없어서 몰랐던 일들이 웹툰 한 편으로 저렇게 줄소환이 되고 보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다시 병원을 찾았고, 1년 반 넘게 상담받으면서 딱 한 번 울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 두 번째로 울었다. 마음속에서 아직 부모를 용서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는 사실을 느끼며 또 어린아이처럼 양가감정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의사 앞에서라도 털어놓으며 울었더니 조금이나마 후련해졌다.


부모가 할 만큼 했다는 점, 잘해준 것도 많지 않냐는 것, 그래도 어떻게 부모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냐. 부모를 탓하며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는 게 부끄러운 거 아니냐. 이런 감정들이 불편했지만 그 자체로 떠다니게 두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있을 뿐이다. 아마도 나는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를 부모님에게 꺼낼 일은 없을 것 같다. 용서가 쉽게 되는 일도 아니거니와 이제 와서 그때 일이 미안하다고 연로한 부모님을 죄인 만들어서 굳이 사과를 받고 싶지도 않다.


다만, 조금 더 마음속에서 있는 힘껏 어린 나를 감싸 안고, 그때의 부모에게 화를 내고 싶다. 마음 안에서. 화를 낼만큼 내고 나면 그때는 용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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