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 아픈 거였지

약발이었어 이 안정감은

by 보라구름

평소에 먹던 약보다 3배나 높여 약을 먹어서 겨우 유지되던 평정심이었던 것을 잊고 있었나 보다. 이 정도의 정서적 안정이 찾아와 준 게 너무 좋아서 그만 약을 먹어서 유지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괜찮은 상태로 유지된다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서 아프다는 것을 잊으려고 그랬나 보다. 내가 거의 다 나은 거라는 착각마저 들었다. 이렇게 쉽게? 그럴 리가..


어쩌다 한번 약을 깜빡해도 곧바로 감정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쉽게 무너져 내린다. 처음에는 왜 이러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 하다가도, 약은 먹었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약을 먹었는데도 이러면 또 증량을 해야 한다는 거니 문제는 더 심각한 것일 테지만.


약효는 빠르면 30분이지만 대부분은 45분~1시간 정도 지나야 나타난다. 꿀꺽하고 삼키고 한 십분 지났다고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건 알지만 심리적으로는 이제 내가 약을 먹었으니 괜찮아질 거야 하는 플라세보 효과도 있다. 불안을 눌러주는 효과를 지닌 약, 심장 두근거림, 두통 같은 신체증상도 잡아주는 편이다. 의존성이나 내성도 거의 없거나 미약한 정도라 크게 걱정하지 않고 감정 상태를 봐서 먹어야 할 때는 고민 없이 바로 먹고 있다. 이런 것을 받아들이는 데도 용기가 필요했다.


평생 정신과 약을 먹고살아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러다 약 못 먹으면 하루이틀도 못 버티고 끔찍한 상태가 되는 거 아니야?



그걸 넘어서기 위해 이런 마음을 먹었다.


평생 먹으면 어때, 기저질환처럼 평생 약으로 관리해야 하는 병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약을 먹음으로써 얻게 되는 심리적인 안정을 기반으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야?



약을 먹는 건 문제가 아니야. 심각한 부작용이 동반되는 게 아니라면. 한 곳에 수북하게 쌓인 약봉지가 싫었다. 수북한 약봉지가 마치 나는 평생 이 약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며, 너는 환자이고, 고로 너는 정상의 범주에 들지 못한다고 비웃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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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봉지 대신에 약통을 선택했다. 약통에 약 이름 써놓고 제습제도 넣어 두고 먹어보기도 했다. 가지런히 정돈된 약통은 왠지 나에게 도움을 주는 고마운 약처럼 보이는 이 말도 안 되는 이분법적 사고에 피식 웃음이 났다. 하지만 요즘은 이마저도 다시 귀찮아져서 그냥 다시 예전의 수북한 약봉지로 돌아가버렸다.


이봐, 약봉지들. 언젠가 너희들 도움 따위 필요 없어져서 다 폐기처분할 날이 올 수도 있어, 알아?



그렇게 큰소리칠 날이 올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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