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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구름 Oct 28. 2023

치타라니요, 선생님

 질병휴직 후 꾸준히 하고 있는 게 있다. 기록이다. 하루종일 먹은 것, 수면 시간, 몸의 컨디션(어디가 불편하거나 아픈 곳이 있는지)을 기록하고 있다. 감정 기록 어플도 사용하고, 그것과는 다른 성격이지만 브런치 글도 꾸준히 올리는 등 기록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패턴이 보인다. 하루이틀 신체적, 정신적 활동이 많았던 날 다음에는 어김없이 그 반대로 신체적, 정신적 활동이 감소한다. 단순히 활동 증가와 감소 패턴만 있는 게 아니라 감정 변화도 거의 비슷하게 따라간다. 감정의 진폭이 엄청나게 빠르고 크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계속 타고 있으며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 롤러코스터에서 내리지 못하고 살아가니 구역질이 날 것 같고, 어지러우면서 탈진 상태가 오며 무기력해지는 상태가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이런 증상은 경조울증이라고 볼 수 있고, 양극성 장애/순환성 기분장애도 동반한다. 이번 주 병원 진료에서 선생님과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항상성을 가지고 일정한 에너지가 유지되는 것과 거리가 먼 것에 대해 이전에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님은 내가 치타와 같다고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단거리로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사냥을 하는 치타. 치타에게 왜 오래 달리지 못하냐고 해봤자 의미가 없다고. 


 치타는 추격을 좋아하며 지상에서 가장 빠른 동물로 알려져 있다. 달리기 시작해서 2초 후에는 시속 72km로 속도를 낼 수 있으며 최고 속력은 무려 108km/h이다. 다만, 이 속도를 오래 유지할 수 없는데 200~300m를 달린 이후에는 속도가 뚜렷하게 떨어진다. 고양잇과 맹수들이 질주 지구력이 워낙 저질이긴 하지만, 치타의 경우 300미터래봐야 10초쯤 뛰면 피크다. 심장이 너무도 급격하게 박동하여 피를 뿜어내기 때문에 오버히트 하고 마는 것.
 500m를 넘어서면 완전히 한계에 도달하며 전력 질주한 후에는 반드시 휴식을 취해야 한다. 한계를 이탈하면 혈류의 상태나 체열 등의 이유로 장기가 손상을 입는다. 때문에 이 상태에서 계속 뛰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 _위키백과, 나무위키  

 

 번아웃이 와서 탈진했다가 에너지 충전해서 마구 달리고 다시 번아웃이 오는 패턴도 이런 치타의 기질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 패턴이 나의 패턴이니 이상한 게 아니라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맨 처음 치타라는 비유를 들었을 때는 수긍이 갔다. 아, 그렇구나 하면서 마음이 가벼워졌는데 이번주는 그렇지 않았다. 



 거기에는 뭔가 빠진 게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단지 오래 달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속상한 치타가 아니다. 짧고 빠르게 달리고 난 뒤, 더 달리면 심장이 터져 죽는 신체 구조라서 못 달리는 건 받아들이면 된다. 문제는 맹렬하게 에너지를 뿜고 나면 그 뒤에는 항상 허무와 무기력이 덮쳐와 질식할 것 같다는 점이다. 신체적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문제가 아닌 거다. 정신적으로 이렇게 진폭이 큰 상태를 오랜 기간 감당하면서 지내다 보니 공포와 불안이 갈수록 커지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진료가 끝날 무렵 지난번 기분조절을 위해 처방받았던 아빌리파이 부작용이 심해서 이번에는 새로 데파코트를 처방받았다. 이번에는 제발 부작용이 없기를 바랄 뿐. 순환성 기분 장애 때문인지 병원에 갈 때마다 선생님에 대한 감정이 양 극단을 오간다. 어떤 날은 그냥 웃기만 하셔도 모든 게 좋아지는 것 같고(그럴 리가;;), 어떤 날은 자꾸 핵심을 벗어나는 대화만 오가는 것 같고, 내 이야기에 집중하기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난다.


 순환성 기분 장애: 약한 우울증과 약한 조증(경조증)이 번갈아가며 나타나고, 기분상태의 지속기간이 긴 양극성장애와는 달리 기분상태의 지속기간이 비교적 짧은 것이 특징이다. 정상적인 기분상태가 거의 없다시피 일 수 있다._나무위키 



 선생님, 저는 그냥 치타는 아니고 순환성 기분장애가 있는 치타인 것 같아요. 가끔 미워해서 죄송하고요, 대체로는 감사해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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