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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구름 Oct 29. 2023

무의식의 외침인가

그만 움직이고 좀 쉬어라 

 어제는 일정이 두 개 있었다. 독서모임 참여와 뮤지컬 관람. 알찬 주말을 보내기에 딱 좋은 일정이 아닐 수 없었다. 휴직을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제 남은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하루를 꽉 채워 보내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일정도 지킬 수 없었다. 아침부터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좁은 집에 인간 둘과 고양이 셋이 같이 살고 있고, 나는 맥시멀리스트이자 물건 호더에 가깝기 때문에 주거공간이 매우 협소하다. 고양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물건은 있어야겠기에 캣타워와, 스크래처 2개가 집 안에 있다. 화장실 3개는 베란다에 뒀다. 스크래쳐가 2개 더 있었는데 아무래도 비좁아 얼마 전에 치워서 이 정도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움직일 때 딴생각을 하면서 움직이면 곤란하다. 바로 어제와 같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아침 일정을 생각해서 너무 서둘러 눈을 떴다. 토요일 오전 6시 반, 이른 시간에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로 잠시 딴생각을 하며 방에 들어가려다가 수납장 앞에 놔둔 스크래처 모서리에 정확히 왼쪽 새끼발톱이 찍혀 들려 올라가고 말았다. 


 고개를 숙여 발톱을 보니 피가 조르륵 흐르고 있었고 한눈에 봐도 발톱은 공중부양이라도 하려는 듯 한껏 위로 들려올라가 있었다. 일단 피를 닦아 내고 소독을 해야 하는데 엄두가 안 났다. 들린 발톱 속살로 소독약을 넣는 것을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축구를 즐겨하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몇 년 전에 엄지발톱이 거의 다 들려 빠진 적이 있었다. 새끼발톱과 비교하자면 면적이 대여섯 배는 넘고 고통도, 흘린 피도 지금의 대여섯 배쯤 되었다. 그때는 여름이었고 아침마다 하는 회의에 지각하지 않으려고 버스 어플을 보면서 계단을 내려가다가 샌들을 신은 발이 꼬여서 그대로 엄지발톱이 나를 떠나려고 했다. 


 발톱이 들려 올라가면 영화에서 보던 고문 장면이 떠오른다. 뭔가를 불라고 협박하면서 손톱이나 발톱 밑에 나무를 꽂거나..(이하 생략);; 휴... 일단 피를 닦고 집에서 좀 걸어 다녀봤다. 다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얼얼한 느낌이 강하고 엄청나게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독서모임도 가고, 뮤지컬도 보러 갈 생각이었다. 방수밴드 하나 붙이고 씻은 다음에 나가면 되지 않나? 많이 안 걸으면 되겠지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작은 새끼발가락은 묵직한 고통이란 무엇인지 알려주겠다는 듯이 내 신경을 줄기차게 노크하기 시작했다. 엄지발톱도 아닌데 왜 이렇게 욱신거리지? 저 작은 것이?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아픔을 느끼게 되자 검색을 해봤다. 그냥 두면 안 될 거 같아서 집 앞 병원으로 슬리퍼를 끌고 갔다. 의사 선생님이 발톱이 들린 정도를 체크하느라 발톱을 또 들어봤다.(아, 아악) 다행히 절반 이상 들린 건 아니라 뽑을 필요는 없겠다고(하..). 드레싱을 한 뒤 거즈와 테이핑으로 새끼발가락을 감싸고 항생제를 처방해 줬다. 그러는 와중에도 피가 조금씩 났다. 


 이 꼴을 하고 독서모임이랑 뮤지컬 관람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자차로 움직이면 모를까 나는 뚜벅이라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데 환승까지 생각하니 걷거나 서고 계단을 오르내릴 일이 많았다. 의사 선생님도 오늘 어디 나갈 일이 있냐고 물었고 꼭 나가야 하면 움직일 때 조심하라고 했기 때문에 결국 일정을 다 취소했다. 


 일정을 다 취소하고 화창한 주말에 침대에 드러누워 있자니 의외로 마음은 편했다. 날려버린 뮤지컬 티켓 비용이 많이 아깝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무의식은 오늘 쉬고 싶었던 걸까? 이 정도는 다쳐야 나가지 못할 것 같아서 새끼발가락을 희생하기로 한 걸까? 알 수는 없지만 왠지 그런 의심이 든다. 


 제발 좀 그만 내버려 두라는 외침을 무시한 대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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