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들
신촌 기차역과 신촌역 사이 뒷골목 언덕길에는 거의 한 집 건너 한 집이 하숙집이다. 요즘은 풀옵션 원룸이나 일반 원룸의 공급도 많아져서 하숙집은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긴 하지만 말이다. <응답하라 1994>에 등장한 하숙집 때문에 하숙집에 살아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로망을 품기도 하고, 하숙집 생활을 해봤던 사람들은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곤 했다.
고시원에서 살았던 사람은 하숙집이 얼마나 더 천국에 가까운지 적어도 첫 달은 느껴보게 된다. 전기 밥통에서 말라비틀어진 밥과 봉지라면이라도 제공하는 것만도 감지덕지했던 고시원에 비해 하숙집은 아침마다 갓 지은 따뜻한 밥과 반찬으로 상을 차려주기 때문이다. 아침 안 먹는 옵션을 선택한 경우라면 방세가 조금 저렴해지고 밥 구경은 못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침을 선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관처럼 좁은 고시원에서도 살아보고, 그 보다 조금 넓은 고시원에서도 살아봤던 나로서는 아침에 밥을 차려주는 하숙집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무엇보다 아침에 한 식탁에 대여섯 명이 둘러앉아 짧은 이야기지만 안부를 묻고 얼굴을 마주하고 밥상을 나누는 것이 좋았다. 비록 공용 화장실을 써야 하고, 옆방과 앞방의 외국인 학생들이(주로 어학당 학생들이었음) 늦은 시간까지 영어로 시끄럽게 떠들어 대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나는 하숙집 내 방에서 밤새도록 미드를 봤다. 양쪽으로 영어를 들어서 그랬는지 당시 리스닝 테스트에서는 꽤 높은 점수를 받았다.
고시원에서의 팍팍함을 견딜 수 있게 해줬던 건 사람들이었다. 총무를 비롯해 몇몇 사람들과 휴게실에서 라면을 먹으며 친해졌고 그러다가 옥상에서 같이 치맥을 즐기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 것도 없었다면 그 시절의 나는 외로움에 사무쳐 벽에 머리를 찧으며 괴로워했을 것이다.
이후 나는 복층 오피스텔로, 투 룸으로 거처를 옮겼고 독립적인 공간과 전망 좋은 창을 가졌지만 사람들은 없었다. 복층 오피스텔에 살 때는 그 집에 누군가를 부른 게 1년 동안 열 번도 안 되었고, 투 룸에 살 때도 역시 비슷한 수준이거나 조금 많았던 것 같다. 하루 종일 말할 상대가 없어서 주말이면 입에서 단내가 나거나 부모님 댁에 전화할 때 입을 떼는 게 전부였던 주말도 꾸역꾸역 삼켰던 날들이었다. 오죽하면 너무 힘들어서 옆 집에 사는 사람들이 친구들과 떠드는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벽에 귀를 대고 한쪽 귀를 막고서 있기도 했을까. 웅얼웅얼 대는 소리로밖에 안 들렸지만 벽 너머로 사람들이 있다는 게 꽤 안정감을 줬다.
사람들이 나를 따돌렸거나, 상처를 줬거나 그런 이유로 혼자였던 건 아니었다. 이런저런 모임에 부지런히 나가 보기도 하고, 잦은 야근으로 주말에는 시체놀이 밖에는 할 수 없어서 외로움이고 뭐고 느낄 겨를 없이 삶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타인에게 가까이 다가서려는 시도를 하면서 동시에 멀어지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 한 채로 언제든 도망가려고 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인맥관리에 소질이 없다. 아니 인맥 끊기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보는 게 맞겠다. 이런저런 친분으로 만남을 이어오다가도 몇 번 그 그룹과의 만남에 빠지게 되면 그들도 자연스레 더는 부르지 않는다.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재주가 있달까. 경조사에 열심히 달려가는 타입도 아니다. 정기적인 모임도 마찬가지. 그렇게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끊어지는 관계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하숙집 사진을 찍다 보니 하늘 위로 어지럽게 전선이 흐르고 있었다. 피해서 찍으려 해도 찍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곳곳으로 뻗어나가 있었다. 그 아래에서 아이폰을 만지작거리며 풍경을 담고 있자니 인간관계의 복잡한 그물망 아래에서 혼자 터덜터덜 걸어가는 내가 보였다.